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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휴전선이 있었네] 6. 분단의 새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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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비무장지대(DMZ)와 그 밑에 인접해 있는 민통(민간인 통제)지역은 내륙습지와 해안 생태계가 공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반도의 다른 지역과 큰 차이를 보인다.

이곳은 또 '국제 습지보호협약'에서 지정하고 있듯이 서로 다른 생태환경, 즉 '국경습지'로서의 특징도 잘 나타내고 있다.

습지란 땅과 물 사이에 식물이 살고 있는 지역들 말한다. 습지가 중요한 이유는 생물의 다양성을 유지해주고 홍수조절.수질정화 효과 등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비무장지대를 개괄적으로 보면 동쪽으로 갈수록 산림이 많아지고 지형과 자세는 험하지만 보전상태는 상대적으로 양호하다.

남북을 가로 지르는 폭 4㎞의 비무장지대는 그 자체가 산악 사이에 위치해 있어 저습지 활엽수림(闊葉樹林)을 비롯, 다양한 형태의 습지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습지는 서해로 흐르는 임진강.한탄강.북한강.소양강과 동해로 흐르는 남강, 그리고 이 수계(水系)들을 중심으로 한 유역에 형성, 유지되고 있다.

반세기 동안 사람의 발길을 허용하지 않았던 비무장지대는 생태계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남북 공히 화공(火攻)작전을 펼친 탓에 이곳의 생태계는 많이 파괴됐으며 그로 인해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 전에 없던 습지 생태계가 형성되고 있다.

이같은 현상은 산불로 기존 식물군이 파괴된 자리에 외부 식물이 칩입해 들어와 기존 식물군과 생존을 위한 경쟁 끝에 새롭게 뿌리 내리고 있음을 의미한다.

비무장지대 1백55마일을 식생(植生)측면에서 볼 때 개발이 빈번한 서부지역에서는 돼지풀.개망초 등 외래종들이, 오염이 덜된 동부지역에서는 양지꽃.뱀딸기 등 자생군락(自生群落)이 많이 발견된다.

또 산림의 계곡은 잘 보전된 반면 능선이나 경사진 부분은 상대적으로 훼손된 곳이 많다.

원산 서쪽 두류산에서 발원(發源), 군사분계선을 따라 남북으로 갈라진 사천에 이르면 갈대와 물억새 군락이 폭 1㎞의 하천 바닥을 가득 메우고 있다.

저수지 안에 섬 생태계가 있는 파주 어룡저수지는 그동안 인간의 간섭을 받지 않아 독특한 습지 생태계를 형성하고 있고 임진강변의 초평도는 이제 계절적인 습지로 볼 수 없을 정도로 생태계가 잘 발달돼 있다.

파주 장단반도는 넓은 습지와 강 서식처가 발달해 있어 큰 기러기 무리와 고라니 등을 관찰할 수 있다.

판문점 부근과 철원분지는 우리나라를 이동하는 두루미에 매우 중요한 중간 기착점과 서식처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해마다 겪는 임진강 유역의 홍수도 알고 보면 산림.습지 등의 파괴와 무관하지 않다.

강원도 철원지역은 동북아를 이동하는 두루미 철새들의 낙원이라고 할 정도로 잘 알려진 곳이다.

산림과 농경지.하천.학(鶴)저수지 등이 자리잡고 있어 새들의 서식에 비교적 양호한 환경을 갖추고 있다.

보전가치가 높은 저습지 활엽수림은 그나마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상태다.

안내장교의 도움으로 남대천에 가 보니 기대했던 대로 담수와 습지식물로 구성된 그곳 생태계는 물과 산림이 잘 어우러져 있다.

펀치볼이 있는 백석산 자락에는 음식 그릇 모양의 습지가 곳곳에 발달해 있다.

또 그 주변 비무장지대에는 멧돼지를 비롯, 멸종위기에 처한 산양이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생태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동서의 분수령인 향로봉(1천2백96m)은 지형이 험준해서 그런지 생태계 보전상태는 매우 양호해 보인다.

초지와 작은 나무층.큰 나무층 등으로 다층구조가 형성돼 있는 향로봉 일대에서는 총 36종의 조류(鳥類)가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정상에서는 우리 자생종인 동의나물.뱀딸기 군락 등은 물론 까마귀 한 쌍도 눈에 띄어 청정지역임을 알 수 있다.

대성산(1천1백75m) 경사지와 능선에서는 어린 참나무류가, 계곡에서는 세잎 양지꽃.노랑 제비꽃과 같은 자생 야생초화류(野生草花類)가, 계곡 습지에서는 무당개구리 등을 볼 수 있다.

국사봉과 가칠봉 사이에서 발원, 동해로 흘러가는 남강은 동해안에서 불어오는 해양성 기후의 영향으로 삼일포(三日浦)와 감호(鑑湖)같은 호수.늪지.건습초원.관목습지.산림습지를 형성하고 있다.

U자형 흐름을 그리는 이곳 수계는 남강에서 방사(放飼)한 연어가 남북을 오가고 있다.

1996년과 지난 봄 발생한 대형 산불로 검게 타 버린 산림식생들은 아직도 그 상흔이 남아 있었지만 산불을 견뎌 낸 참나무류.고사리 등 야생 초화류는 파릇파릇 새싹을 띄우며 재생하기 위한 몸부림을 치고 있다.

우리 민족의 가슴 속에 남아 있는 상처에서 새 살이 돋아나듯 아픔을 뒤로하고 새싹을 틔우는 자생 식물들의 모습은 애틋하기까지 하다.

식생의 천이과정이 갈등과 경쟁보다 공생과 협동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 이번 휴전선 답사에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이다.

답사일정 마지막 날 본 민통지역 이남에서는 시들어 버린 양지꽃과 같은 야생화나 꼬리 조팝나무.산벚나무.복사나무 등이 뒤늦게 만개해 있었다.

이 지역은 한반도의 '생태적 허리' 로서 남과 북을 연결해 주는 통로라는 의미가 있다.

따라서 이 지역에서 근무하는 장병들에게는 국토방위라는 본연의 임무 외에 '생태계 지킴이' 라는 특별한 임무를 추가로 부여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을 계기로 반목과 대결을 넘어 평화와 공생공존을 추구해 나가야 할 지금이야말로 그동안 버려진 비무장지대를 생태.환경학적 측면에서 잘 보전할 수 있는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필자는 지난 5월 유엔개발계획(UNDP) 사업의 일환으로 '파주 비무장지대와 민통지역의 지속가능한 관리전략' 에 관한 종합 보고서를 발간한 바 있다.

나는 이번 답사를 통해서 파주 연구결과를 타지역에 적용해 볼 수 있는 가능성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이번 답사는 내게 또다른 의미를 가져다 주었다.

한반도 유일의 금지된 땅 비무장지대. 답사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필자는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이제 남과 북은 그동안 소홀히 해 왔던 비무장지대를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정밀조사를 통해 자연생태 지도와 생물다양성 지도라도 작성할 수는 없을까.

김귀곤 서울대 환경생태계획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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