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소련의 실패한 정상회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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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정상회담은 실패하기도 한다. 상대방에 대한 지나친 우월감이나 섣부른 판단이 원인이다. 회담을 열기 전보다 관계가 악화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1953년 스탈린 사망 후 소련과의 관계개선을 염원하는 서방세계의 기대를 받으며 국제무대에 등장한 흐루시초프 서기장의 정상외교가 대표적인 사례다.

흐루시초프는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지도자 자리를 놓고 마오쩌둥(毛澤東)중국 국가주석과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새로운 지도자가 되는 게 당연하다는 입장이었으나 毛는 흐루시초프를 '떠버리 선동가' 정도로 취급했다.

소련이 미국을 누르고 인공위성 등 신무기 개발에서 앞서나가던 57년 11월 毛는 볼셰비키혁명 40주년 기념식 참석을 명분으로 흐루시초프와의 회담을 추진했다. 흐루시초프는 TU-104 제트기를 중국으로 보내 毛주석을 영접하는 예우를 보였다.

그러나 毛주석이 모스크바 방문을 마치고 몽골.폴란드.루마니아.체코 등을 돌며 영향력 확대를 꾀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한 방해공작에 나섰다. 동구국가 정상들이 함께 모인 자리에선 毛에 대한 인신공격까지 퍼부었다. 발끈한 毛는 일정이 끝나기도 전에 베이징(北京)으로 돌아가버렸다. 지나친 경쟁심이 부른 회담결렬이었다.

흐루시초프 서기장은 2년 뒤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베이징을 방문했다.그러나 똑같은 상황이 재연됐다. 이번엔 毛주석이 흐루시초프 서기장에 대해 면박을 준 것이다.

이에 대해 흐루시초프는 회담이 끝나자마자 중국의 각종 공장 건설현장에서 활동하던 자국 기술자들을 모두 소환해버렸다.

흐루시초프는 이 회담 후 "毛에 대해 개인적인 악감(惡感)까지 품게 됐다" 고 자서전에서 밝힌 바 있다. 흐루시초프는 또 61년 10월의 모스크바 제22차 공산당대회에서 스탈린 비하와 동시에 毛주석의 교리를 싸잡아 비난했고 이후 두 사람은 되돌릴 수 없는 사이가 됐다. 두 정상의 관계악화는 결국 양국이 중.소분쟁으로 치닫는 직접적 계기가 됐다.

흐루시초프는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과의 회담에서도 우를 범했다. 회담 전부터 당시 44세로 25세 연하였던 케네디를 '풋내기' 로 얕본 그는 실제 회담을 통해 자신의 판단을 더욱 과신하게 됐다.

기고만장해진 그는 "서방국가를 불바다로 만들어 버리겠다" 는 극언을 서슴지 않더니 이듬해 쿠바에 미 본토를 직접 공격할 수 있는 미사일을 배치해 긴장을 고조시켰다.

하지만 케네디는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는 회담 전부터 이같은 흐루시초프의 허세를 간파했고 소련의 미사일 전력을 손바닥 안에 훤히 궤뚫고 있었다.

케네디는 외교역량을 총동원, 쿠바 봉쇄에 성공했고 당황한 흐루시초프는 이듬해 두 손을 들고 말았다. 흐루시초프의 명성은 이 사건을 계기로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해 결국 실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됐다.

장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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