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그때 오늘

빈민층 구제, 사회보험 도입에 앞장선 윈스턴 처칠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7면

1911년께 런던 빈민가 아이들이 그들 형편으로는 꿈도 못 꿀 가게 진열품을 바라보고 있다. 맨발인 것으로 보아 가족과 함께 사는 아이들로 추정된다. 고아원 아이들은 자선단체에서 신발과 옷을 주며 보살폈으므로 오히려 형편이 좋았다.

에드워드 7세 시대(1901~1910)의 런던은 세계 최대 도시였다. 인구는 40년 만에 두 배로 증가해 720만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빈민가에서는 침대가 충분치 않았다. 어린이들은 바나나 상자 안에 면으로 된 누더기와 마직물을 깔고 자야 했다. 어떤 하숙집에서는 침대 하나를 3명에게 대여해 8시간씩 번갈아 가며 자도록 했다.

‘그 집(the House)’으로 불린 빈민수용소가 있긴 했다. 이곳은 더 이상 밀려날 곳 없는 마지막 단계로 간주됐다. 체면을 중시하던 빈민들은 여기에 추락하는 불명예를 두려워했지만, 몇 주 동안 몸이 아파 일을 하지 못하면 곧장 그 불명예로 떨어졌다. 빈민들이 이런 신세를 면키 위해 의지하는 전당포가 있었지만, 많은 사람은 전당포에 맡길 물건조차 없었다. 의자가 없어 음식을 서서 먹는 사람마저 허다했으니 전당포에 가져갈 시계나 가구 따위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런 사람은 고리대금업자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자가 연리 400% 이상이었다. 악독한 불법 관행이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는 빈민들이 널리 이용했다.

소녀들은 거리에서 몸을 팔아 빈민가를 탈출했다. 예쁜 아이들에게는 그들의 몸에 눈독 들이는 시장이 활짝 열려 있었다. 매춘은 매우 위험한 직업이었다. 사실상 모든 창녀가 매독·임질 등에 걸려 있었지만 치료약이라고는 수은뿐이었다. 열두 살밖에 되지 않은 소녀들이 유괴돼 외국 사창가로 팔려 나갔다. 일부는 인도와 싱가포르의 사창가로 끌려갔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사창가에서는 영국 소녀들의 인기가 매우 높았다. 극빈층 자녀들은 차라리 고아가 돼 ‘그 집’에 보내졌더라면 훨씬 건강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고아원과 빈민수용소는 어린이 한 명당 매주 최소 6실링을 지출했지만 빈민 가정은 그 절반 정도밖에는 지출할 여력이 없었다. 요크 지역 전체 가구의 4분의 1이 빈민수용소보다 못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빈민의 건강 상태는 극도로 나빴다.

인종의 쇠퇴를 걱정하는 글이 쏟아져 나오자 정치인들이 긴장했다. 혁명이 있었다. 사회 상층부의 ‘양심의 동요’에서 비롯된 혁명이었다. 1904년 보수당에서 자유당으로 옮겨 간 윈스턴 처칠(1874~1965)은 재무장관 로이드 조지와 긴밀히 협력하면서 노인연금·건강보험·실업자구제 등 사회 개혁에 앞장섰다. 하지만 기득권층은 못마땅했다. 그들에게 처칠은 ‘계급의 배신자’였다. 한파 몰아치는 계절, 처칠 같은 ‘배신자’는 많아도 좋을 것 같다.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