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포커스] 진실을 말하는 용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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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지난해 11월 베를린 장벽 붕괴 10주년 때 빌 클린턴 대통령은 통일독일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의 공로자로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을 거론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이 장벽 안에 있던 인물들이 듣기 거북해 했지만 '소련은 악(惡)의 제국'(evil empire)'이고 이 장벽은 무너져야 한다' 고 너무도 솔직하게 말했다" 고 회상했다.

모두가 그런 진실을 알았지만 그 진실을 말하기 꺼려했던 시절에 레이건 대통령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용기가 있었다는 것이다.

1983년 3월 플로리다주 올랜도에서 열린 한 모임에서 레이건은 "영향력 있는 많은 인물이 소련 전체주의 권력의 실체를 솔직하게 인정하기를 꺼려 한다.

우리는 이 '악의 제국' 의 역사적 진실과 그들의 공격적 본능을 의식적으로 외면하고자 하는 유혹을 경계해야 한다" 고 말했다.

미국의 소위 진보적 인사들은 이 연설을 헐뜯고 비판했다. '원시적' 인 연설이라느니, '소련을 혐오하는 강박관념의 표출' 이라느니 심지어 한 역사학자는 '역대 대통령연설 중 최악의 연설' 이라고까지 혹평했다. 10년이 못돼 역사는 레이건의 연설이 진실이었음을 증명해 주었다.

이러한 레이건이 85년 소련에 고르바초프가 등장하면서 그해 11월 제네바에서 미.소 정상회담을 가졌다.

그는 자신이 소련이라는 전체주의 체제를 미워했지 소련 지도자 누구를 비난하거나 미워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단독회담에서 소련에 대한 자신의 인상을 솔직히 밝혔다.

"당신의 정부는 세계 공산화와 혁명의 수출을 항상 얘기한다. 지금도 팽창주의 정책을 유지하고 있다. 우리가 당신들을 불신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솔직히 말하면 우리는 당신들이 두렵다." 그러면서 그는 상호협력이 어렵다면 최소한 일정한 신뢰의 틀 안에서 선의의 경쟁을 제의했다.

소련이 듣기 싫어하는 소련의 인권문제도 거론했다. "반체제 인사들과 유대인들이 감옥에 갇혀 있는 상황에서 민주국가인 미국의 지도자가 이를 눈감고 소련과 협상을 한다는 것은 정치윤리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 임을 언급했다.

그는 핵전쟁 방지를 위해 우주방위계획(SDI)에 소련의 동참을 요구했다. 그러나 소련은 이미 경제력.기술력으로 볼 때 이를 추진할 능력이 없었다.

소련이 미국과의 군비경쟁을 포기하고 해체의 길을 걷게 된 계기는 레이건의 이러한 '힘을 바탕으로 한 원칙외교' 때문이었다(레이건 회고록:Dutch, p550~575).

남북 정상회담 준비가 한창이다. 회담의제.의전.경호 등 중요치 않은 분야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회담에 무슨 원칙을 갖고 임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없다. 역사적인 회담이니 성공시켜야 한다는 얘기 뿐이다.

이번 회담에서 북한 공산주의 체제를 어떤 눈으로 보아야 하고, 평가해야 하는가. 6.25 전쟁의 책임은 어떻게 매듭지어야 하는가.

북한의 인권탄압 문제는 어떻게 다룰 것인가. 통일한국의 체제는 무엇이 돼야 하는가 등등 너무나 중요한 문제들이 거론조차 안되고 있다. 대통령이 이러한 문제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회담에 임하는 지에 대해서도 알 길이 없다.

물론 회담을 성공시키기 위해 이런 원칙적인 문제를 협상자리에서는 뒤로 돌릴 수도 있겠다. 또 6.25전쟁 같은 과거의 문제 때문에 미래가 발목 잡혀서도 안된다.

하지만 우리 내부에서조차 이런 원칙적인 문제들에 대한 합의가 없이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 우리는 일본과 정상회담을 할 때마다 한.일간의 불행한 과거에 대한 일본의 반성을 받아냈다.

그렇다면 남북 정상간에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동족상잔이라는 불행한 과거를 어떻게 규정하고 매듭지을 것인가라는 문제가 당연히 이 시절의 담론이 돼야 한다.

이런 기본 문제에 대한 우리의 원칙이 무엇인지 국민은 알고 있어야 한다. 무조건 회담을 성공시켜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중요한 원칙들이 쉬쉬하며 뒷전으로 물러나고 상대방 비위만 맞추는 회담이 돼서는 안된다.

역사는 진실을 회피하기보다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요구하고 있다. 그것이 오히려 통일 한국을 더 빨리 달성시키는 길이 될 것이다.

문창극 <미주총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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