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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인터뷰] 키 크는 유전자 비밀 풀어낸 김빛내리 서울대 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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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김빛내리(40) 서울대 교수가 또 하나의 개가를 일궈냈다. 미국의 세계적 생명과학 학술지인 ‘셀(Cell)’에 ‘마이크로RNA’에 관한 획기적인 연구 결과를 11일 게재했다. 아기가 태어난 뒤 키와 몸집이 커져 성인이 되는 과정이 무엇인지 초파리 실험을 통해 뚜렷한 단서를 찾아냈다. 아울러 마이크로RNA가 잘못될 경우 생길 수 있는 당뇨병이나 암 등 난치병의 치료제 개발 가능성을 열었다.

세계 생명공학계도 김 교수 연구팀의 활약을 예의주시한다. 올 들어서만 셀에 그의 논문은 세 번째 실렸다. 평생 한 번 실리면 영광이라는 셀에 이렇게 자주 논문을 발표한 경우는 세계적으로도 드물다. 김 교수가 2002년 마이크로RNA 연구를 시작한 이래 영국 네이처에 한 편, 셀에 여섯 편의 논문을 실었다. 차세대 항암 소재로 주목받는 마이크로RNA 분야에서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연구그룹을 형성한 것이다. 덕분에 한국인 과학자 가운데 노벨 과학상 수상에 가장 근접한 인물로 꼽힌다. 물론 김 교수는 이런 이야기가 부담스럽다. “5∼10년 동안 마이크로RNA 분야에서 완전히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야 노벨상이 가능할 거예요. 열심히 하고는 있지만요.”

창창한 나이에 이미 상복도 많이 누렸다. 2004년 마크로젠 신진과학자상, 지난해 로레알-유네스코 여성과학자상에 이어 올해에는 상금 2억원의 호암상 의학상까지 받았다. 김 교수는 낯을 좀 가려서 그런지 언론에 나서길 꺼린다. 인터뷰 요청이 쇄도하지만 주변이 어수선해질까 걱정한다. 지난달 30일 서울대에서 그를 만났다. 시간을 아끼겠다고 점심을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바람에 인터뷰하기 빠듯했다. 괄호안 ※표시는 독자 이해를 돕기 위한 설명.

-상복을 타고난 것 같습니다.

“연구에 몰두할 뿐인데 예상 외로 주변에서 관심이 많은 것 같아 솔직히 부담스럽습니다. 지난해 수상한 로레알-유네스코 여성과학자상이 인상 깊었어요. 함께 상을 받은 엘리자베스 블랙번(61·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 샌프란시스코 캠퍼스) 교수와 아다 요나트(70·이스라엘 바이츠만과학연구소) 박사가 각각 올해 노벨 생리의학상과 화학상 수상자로 뽑힌 걸 보고 각오를 새로이 했습니다.”

-그만큼 노벨상에 근접했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주변에서 그런 얘기 들을 때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요. 과학자들은 누구나 자신이 이룬 성과를 다른 과학자들이 이어받아 가지를 쳐 주길 바랍니다. DNA(유전자) 구조를 규명한 제임스 웟슨과 프랜시스 크릭 박사도 그들의 연구 성과를 다른 과학자가 많이 따른 덕분에 위대해졌거든요. 제 연구도 좀 더 임팩트를 가져야 합니다.” (※미 출판사 톰슨사이언티픽이 2002∼2006년 분자생물학 분야에서 인용 횟수가 가장 많은 과학자 25명을 발표했는데, 김 교수가 13위였다. 아시아권에선 유일하다.)

-한국인 노벨 과학상 탄생의 염원이 언제쯤 실현될 걸로 보십니까.

“목마른 분들이 많다는 걸 잘 압니다. 한국에서 기초과학에 신경 쓰기 시작한 지가 얼마 안 됐는데, 이웃 일본은 기초과학의 중요성을 알고 투자한 지 100년이 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연구 환경도 빨리 발전해 희망적입니다. 2001년에 귀국했을 때와 지금의 세미나 분위기만 비교해 봐도 많이 다릅니다. 학생들의 질문 수준도 달라졌고요. 단백질 구조 분야의 세계적 석학인 딘쇼 파텔 교수가 POSTECH(옛 포항공대) 학생들한테서 감명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파텔 교수는 세 가지 주제를 놓고 금요일 오후 5시부터 세미나를 진행했는데, 시간 관계상 두 번째 주제까지만 하고 나머지는 다음 기회로 미룰 참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학생들이 마지막 주제도 들어가자고 졸라 저녁 식사 후 오후 8시부터 세미나를 재개했다고 해요. 우리 연구 풍토가 급속히 좋아지고 있어 10∼20년 뒤면 (노벨상이 나올 정도의) 선진국 수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마이크로RNA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뭡니까.

“미국에서 박사 후 연수과정을 밟으면서 RNA 연구를 했습니다. RNA 중에서도 마이크로RNA 연구를 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국내에 들어와 2001년 한 저널에서 우연히 관련 논문을 보면서였어요. 선진국 수준의 연구 환경 속에서 일했다면 지금보다 더 앞서 나갈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습니다.”

-어떤 점이 가장 아쉬운가요.

“역시 연구비죠. 현재 ‘창의과제’(※교육과학기술부와 한국창의재단이 지원하는 ‘창의적연구진흥사업단’ 사업)를 3년째 수행하고 있습니다. 이걸 하면 9년간 연구비를 안정적으로 지원받는 대신 다른 연구과제를 더 따낼 수 없습니다. 최근 시료(시험재료) 값이 올라가면서 올해에는 2억원 정도 적자가 날 것 같아요. 밑지는 부분은 시료 납품업자들로부터 외상으로 쓰는 실정입니다. 내년 연구비를 앞당겨 쓰는 셈인데, 내년 연구 규모를 40% 정도 줄이지 않으면 누적 적자를 면할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연구 수준을 유지하고 경쟁에서 이기려면 실제로 연구 활동을 줄이기 어려워요. 치열한 경쟁 관계인 미국의 어떤 교수는 연구비가 저의 세 배나 됩니다. 나름대로 아끼지만 힘들어요. 연구비 부족하다고 하면 다들 놀란다니까요.”

-기업체 연구비를 타면 되지 않나요.

“기업 연구비는 공짜가 아니에요. 마음대로 연구 방향을 결정하기 힘듭니다. 우리 연구실에서 산업화 연구는 시기상조이고, 기초연구의 질을 높일 때라고 봅니다.”

-앞으로 5~10년이 중요하다고 했는데요.

“가장 한정된 자원은 사실 시간이에요. 인력이나 연구비는 늘릴 수도 있지만 시간은 어쩔 수 없잖아요. 시간을 효과적으로 쓰려면 불필요한 일을 추려 내고 중요한 일에만 집중해야 합니다. 핵심 연구업무, 가령 논문 읽고 결과 분석하고 연구원들과 토론하는 일에 시간을 쏟는 길밖에 없습니다. 시간 관리 못지않게 중요한 건 연구팀 내 자유로운 소통입니다. 교수라고 권위적 분위기를 만들기 시작하면 회의 모습이 달라집니다. 요즘도 내가 있을 때와 없을 때 실험실의 토론 분위기가 다른 것 같아 반성하곤 합니다.”(※연구팀은 박사 후 연수과정인 3명과 계약직 교수 한 명 등 17명이다.)

-건강은 어떠신지요.

“2년 전 위암 선고를 받았습니다. 수술할 필요가 없는 초기 단계라 약물 치료로 완치되긴 했지만 심적 충격은 컸어요. 그 이후로 연구할 시간이 더 귀하게 느껴져 시간을 더욱 쪼개 쓰기 시작했습니다. 앞으로 연구 인생이 30년 정도 남았다고 보고 시간을 효과적으로 쓰려 애씁니다.” (※암 선고 받은 일은 어렵사리 털어놨다.)  

글=심재우 기자, 사진=강정현 기자

◆키 크는 유전자=미국 생명과학지 셀에 11일 실린 김빛내리 교수의 논문 주제는 마이크로RNA가 신체 발육기에 키 크는 열쇠를 쥐고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키가 크는 비밀을 유전자 수준에서 정확하게 짚어낸 사람은 없었다. 실험은 사람의 유전자와 비슷한 점이 많은 초파리로 했다. 8번 마이크로RNA가 인슐린 분비를 적절하게 조절하고, 그 결과 몸이 정상적으로 발육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인슐린은 당뇨 환자를 치료하는 호르몬 정도로 일반인에게 알려져 있지만 키 크는 데도 관여한다는 것이다. 마이크로RNA는 동식물마다 수백 개씩 들어있다. 기능이 제각각이지만 그것이 무언지 다 밝혀내지 못했다. 마이크로RNA의 주된 역할은 유전자들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도록 이상한 유전자를 적절하게 통제하는 일이다. 크기가 매우 작지만 생명체의 탄생과 성장·노화·사멸 등 생명 현상 전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김빛내리 교수는 …

평생 논문 한번 실리면 영광이라는 셀 학술지
올해만 세 번 발표해 국내외 상도 휩쓸어

-1992년 서울대 미생물학과 졸업

-1998년 영국 옥스퍼드대 박사

- 2001년 서울대 생명과학인력양성사업단 계약교수

-2004년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 주요 상훈: 제1회 마크로젠 신진과학자상(2004년), 제2회 마크로젠 여성과학자상(2006년), 과학기술부·한국과학기술한림원 제10회 젊은과학자상(2007년), 한국과학재단·미국 2톰슨사이언티픽 연구 영역 개척상(2007년), 과학기술부 올해의 여성과학기술자상(2007년), 로레알-유네스코 여성과학자상(2008년), 제19회 호암상 의학상(2009년)

엄마 김빛내리
“워킹맘 힘들어, 출산 후 일 포기할 생각도”

-두 아이 키우려면 어려움도 많겠네요.

“학부모로는 빵점이에요. 딸아이는 올해 영어·수학 학원에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어려서부터 너무 빡빡하게 지내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초등학교 5학년인 딸과 7살 아들이 있다.)

-요즘 교육은 창의성의 씨앗을 말리는 것 같습니다.

“사교육이 법으로 금지된 시절에 학교를 다녔지만 부족함을 느끼지 못합니다. 외국어 교육을 좀 더 받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정도예요.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건 단순 지식보다 통찰력과 문제해결 능력입니다. 대입 경쟁이 인생을 좌우하는 사회풍토를 바꾸는 것이 근본 해결책이라고 생각합니다.”

- 출산장려 정책을 어떻게 봅니까.

“자녀 많이 낳는 가정을 지원하는 방식은 미흡합니다. 사회환경을 여성친화적으로 바꾸어야 해요. 가령 출산 후 직장으로 쉽사리 복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도 박사과정을 마친 뒤 첫 아이를 낳고 너무 힘들어 일을 포기할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자식들은 무얼 시킬 겁니까.

“재능에 맞는 일을 찾아야 행복해집니다. 딸아이는 언어 재능이 좀 있는 것 같고 사교적이에요. 저와 달리 운동도 좋아하고요. 둘째는 과학자를 시키고 싶어요.”

-학창시절의 꿈은 뭐였나요.

“고교 시절 과학사를 읽고 자연과학을 공부해보고 싶어졌습니다. 1남4녀의 막내딸로 태어나 진로는 알아서 택했죠. 아버지는 의사가 되길 바랐지만 내 뜻을 존중해 주셨어요. ”

- ‘세상을 빛내라’라는 뜻으로 어른들이 이름을 지어 줬다던데요.

“(웃으며) 특이해 불편할 때도 있어요. 어려서부터의 애칭인 ‘내리(Narry)’를 영문 이름으로 쓰는데 외국인들이 발음하기 쉽고 잘 기억해 편합니다. 내리는 아랍어로도 ‘나의 빛’이란 뜻이 있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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