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신의 나라' 총리는 누구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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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잊을 만하면 튀어나오는 일본 정치인.각료들의 '문제발언' 을 일일이 지적하자면 한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모리 요시로(森喜朗)총리의 '일본은 천황 중심의 신(神)의 나라' 발언은, 주변국과 국제사회에 대한 책임과 역할 확대를 강조하는 한나라 총리로서의 기본철학마저 의심케 한다.

이달 말 방한 일정을 의식한 탓인지 몰라도 일제시대 황국사관(皇國史觀)을 연상시키는 그의 발언에 대해 흔한 유감성명 하나 내놓지 않은 우리 정부의 태도에도 문제가 있다.

일본 야당은 모리 총리의 발언이 옛 일제시대 헌법과 유사한 발상에 근거한 만큼 국민주권론에 입각한 현행 헌법에 위배된다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나섰다.

그러나 우리는 일본헌법을 따질 것도 없이, 과거 식민지지배 치하에서 강제로 신사참배에 동원됐던 과거사부터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지난 9일 모리 총리가 한 후원회에서 "교육칙어에는 좋은 점도 있다" 고 발언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비판받아 마땅하다.

주변국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도 갖추지 못한 총리?믿고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 를 낙관할 수는 없는 법이다.

모리 총리는 뒤늦게 "오해가 생겼다면 사과한다" 고 말했지만 발언 내용을 취소할 뜻은 없다고 밝혔다.

일본사회가 전반적으로 우경화한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최근의 총리들은 개인의 소신과 중책을 맡은 공인으로서의 역할을 구분해온 편이었다.

타계한 전임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총리만 하더라도 외상에 취임하면서 주변국을 의식해 '다 함께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는 모임' 의 회장직을 그만두었다.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전 총리도 전쟁 중 사망한 군인 유족단체인 '일본유족회' 회장직을 총리 취임에 앞서 사임했다.

모리 총리의 경우 자신이 고문으로 있는 '신도(神道)정치연맹 국회의원간담회' 에 이번에 현직 총리로서는 처음 참석한 것으로 알려졌고, 결국 문제의 '신의 나라' 발언파문을 일으키고 말았다.

다음달 총선을 앞두고 표밭을 의식한 행동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총리로서 경솔하기 짝이 없었다고 본다.

천황을 신격화한 결과 황국사관에 물든 군부가 권력을 독점하고 침략전쟁.식민지수탈.패전으로 이어진 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 아닌가.

우리 정부도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매번 꿀먹은 벙어리처럼 있을 일이 아니다. 따끔하게 경고할 것은 해야 한다.

모리 총리도 오는 29일 방한이 예정된 만큼 그 전이든 방한 중이든 자신의 온당치 못한 발언에 대해 명확한 태도로 사과와 재발방지 의지를 보여주기 바란다.

21세기 디지털시대에 '신의 나라' 에서 찾아왔다는 총리를 우리가 그저 따뜻이 맞이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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