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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국가신뢰 좀먹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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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엊그제 3개 부처 장관들이 함께 발표한 '핵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4원칙'은 정부의 고육지책이었다. 우라늄 분리와 플루토늄 추출실험 등을 둘러싸고 국제사회의 의혹이 가시지 않는 마당에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궁지에 몰렸던 것 같다. 그러나 국제원자력기구(IAEA)에서 경험했던 정부의 곤혹스러움은 정작 딴 데 있어야 마땅하다. 정부가 나라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과 국제협약의 엄중함에 대한 인식 부족, 그리고 정부 부처 간에 딴소리 늘어놓기가 문제다. 게다가 양강도 폭발과 관련해 정부가 보인 어설픈 대응 역시 언론 보도에 화들짝 놀란 나머지 사태의 큰그림에 대한 이해 없이 말부터 앞선 데서 드러났다. 몰라서 모른다고 얘기하면 국민이 정부의 무능력을 탓할 게 뻔하다. 그래도 설익은 정보를 들먹거리며 불신을 자초하는 어리석음보다는 낫다. 적어도 국제사회로부터 망신당하진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으려면 정부의 입장 발표 때 어느 시점에 누구를 내세울 것인지부터 따져봐야 한다. 외교.안보.통일 업무를 특정 인사가 관장하도록 한 결정부터 이해가 되지 않지만 정보에 확신이 가지 않는 사안을 그런 자리에 있는 사람이 설명하는 건 애초부터 잘못됐다. 더욱이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의장 자격으로 했으니 한국의 외교.안보 및 정보조직 전체의 한계를 만방에 알린 꼴이다. 양강도 폭발 같은 경우는 NSC 대변인이 먼저 나서야 했을 일이다. 실체야 어떻든 장관이 앞서 언급해 버리면 나중에 잘못을 수정할 여지가 사라지고 만다. 그런데도 장관이 자꾸 언론 앞에 나서 불신과 망신을 자초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국민의 신뢰가 외교안보정책의 최고 자산'이란 통일부 장관의 언급이 취임 이후 잇따른 시련에서 얻은 학습결과이길 바란다.

마침 외교통상부에 차관보급 대변인직이 신설됐다. 미국식으로 정례 브리핑을 매일 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런 자리까지 만들었으니 장관들이 앞다투어 국민 앞에 나서는 일은 가려서 해주면 좋겠다. 국민의 혼란과 국제사회의 오해를 낳는 적지않은 경우들이 행동보다 말이 앞서는 지도자와 고위 관리들의 버릇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왜 이해하지 못하는가. 말이 난무하다 보니 막말로 치닫고, 반응 역시 막가자는 식으로 나오는 악순환이다. 사회가 이런 쪽으로 흘러가다 보니 서울에 근무하는 외교관들조차 직설적이 돼가고 있다. '홀로 서 있는 한국''혼란은 결국 대통령의 성격 탓'이라는 등 외교관의 입에서 듣기 힘든 말들이 터져나온다. 한마디로 국제사회로부터 대접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부시 대통령의 후보 수락 연설에서 한국이 우방 명단에 끼이지 못한 해프닝이나 양강도 폭발과 관련, 미국의 국무장관이 북측 주장에 공감을 표할 때 우리 정부는 여전히 딴소리하고 있었던 일들은 한국에 대한 배려나 고려가 작동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한국을 무시하는 건 우방뿐 아니라 북한도 마찬가지다. 신임 장관 취임 이후 통일부는 이제나저제나 장관급 회담 열리길 손꼽아 기다리고 있지만 현재 북측의 우선 고려대상에서 한국은 빠져있다. 북한은 미국 대선까지는 외교부 창구만 열어두고 국제사회 속에서 자신들의 살 길을 모색하고 있다. 과거사 정리로부터 보안법 철폐, 수도 이전까지 감당할 역량 없이 정부의 개혁전선을 갈수록 넓혀가면서 국론 분열을 자초하는 우리와 달리 북측은 정책의 우선순위를 확실하게 설정하고 체제 존립에 몰두하고 있다.

주변과 동족의 무시를 자초하는 우리의 어설픔과 어리석음은 언제쯤이나 멈추려나.

길정우 통일문화연구소장 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