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재발 막을 문화재 정책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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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발굴 중인 문화유적지가 주민들에 의해 불법 훼손되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일어났다.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 유적 발굴현장을 재건축아파트 입주예정자들이 굴착기까지 동원, 파헤쳐 버린 것이다.

주민들은 "공사를 재개하려 했을 뿐 유적을 파괴할 생각은 없었다" 고 고의성을 부인하고 있지만 동기야 어찌 됐든 결과적으로 귀중한 문화유산에 돌이킬 수 없는 '테러' 를 가한 셈이 됐다.

지난해 9월 한신대학교 박물관팀이 본격 발굴에 나선 풍납토성은 서기 전 1세기부터 5세기까지 한강변에 있었다는 초기 백제왕도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의 실체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8개월여에 걸쳐 진행된 발굴작업에서는 '대부(大夫)' 라는 관직명이 새겨진 도기편과 함께 무려 5백여상자분에 이르는 각종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이곳이 하남위례성으로 밝혀질 경우 미스터리였던 초기 백제 수도의 위치가 규명되는 것은 물론이고 '삼국사기' 기사의 신빙성과 관련, 논란을 빚던 백제의 건국 및 고대국가 성립시기 등 역사적 사실들이 새로이 정립될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중요한 의미를 지닌 풍납토성 발굴 유적지를 굴착기까지 들이대 훼손.파괴한 행위는 무슨 변명을 늘어놓는다 해도 정당화할 수 없는 문화적 만행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번 사건에 일차적 책임을 져야 할 쪽은 유적지 훼손을 감행한 주민들이다.

그러나 엄밀하게 따져 역시 책임의 근원지는 서울시와 문화재보호 주무부서인 문화재청이다. 이들은 우선 그곳 주민들에게 풍납토성 유적이 갖는 의미와 중요성을 인식시키는 데 실패했다.

유적을 보존해야 할 경우 응당 따르게 마련인 주민 재산권에 대한 제약 문제를 속수무책으로 방관만 했다.

주민들에 대한 보상이 예산상 어렵다면 유적지로 보존해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만이라도 속히 결정해 알려줬더라면 주민들도 그처럼 조급하게 불법 훼손행위에 나서지는 刻弩?것이다.

조합측은 '발굴이 완료된 곳부터 공사를 재개하겠다' 는 공문을 보냈는데도 서울시나 문화재당국이 4~5일이 지나도록 답을 주지 않았다고 항변하고 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문화재당국이 직무유기를 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이번의 풍납토성 훼손.파괴만으로 문제가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유적지를 지정.발굴하려면 문화재 보호와 그곳에 살고 있는 주민들간의 재산권 및 생존권 보호가 충돌하는 것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유사한 사건의 재발을 막으려면 역시 지자체나 정부가 주민들의 생존권 희생을 강요할 게 아니라 해당지역을 매입한다든가 납득할 만한 보상금을 지급하고, 법이 잘못됐으면 고치는 등 보다 적극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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