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일본 안보정책 변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냉전 붕괴 후 일본 안보.방위 전략의 질적 변화는 외부 요인에서 비롯됐다. 1991년의 걸프전, 94년의 북한 핵 위기, 98~99년의 북한 미사일 시험발사와 공작선 침입이 그것이다.

일본은 이를 빌미로 헌법 해석(해석 개헌)을 통해 자위대의 활동반경을 넓혔고 미.일 동맹의 강화로 이어진 안보 관련 국내법 정비에 나섰다.

사회당(현 사민당)의 몰락과 새 국가주의 바람은 이같은 정책 전환을 가능케 한 국내적 토대였다.

92년 자위대가 바다를 건널 수 있도록 한 국제평화협력법(PKO법) 제정은 걸프 위기의 산물이다.

걸프전 당시 일본은 미국의 병참지원 요구를 거부하고 전비만 1백26억달러 부담했다. 석유자원의 70%를 의존하고 있는 지역의 분쟁 해결에 군사적 공헌을 하지 못한데 대한 국제적 비난은 컸다.

정치권은 국제 공헌을 명분으로 PKO법을 만들어 캄보디아.모잠비크 등에 자위대 요원을 보냈다. 임무는 정전 감시를 비롯한 비전투 활동이지만 '자위대 역사에 한 획을 긋는 것이었다. 일본의 유엔 안전보장회의 가입 및 보통국가론이 비등한 것도 이 무렵이다.

북한 핵위기는 일본 주변의 비상사태 때 자위대가 발을 들여놓을 수 있도록 한 계기가 됐다. 당시 미국은 유엔 안보리의 대북 경제제재가 중국 반대로 불가능할 것으로 보고 한.미.일 3국의 제재를 추진했었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들어주지 못했다. 위기를 느낀 미국은 96년 미.일 안보공동선언, 97년 새 방위협력지침 제정을 주도했다.

새 가이드라인은 일본 주변의 비상사태 때 자위대의 미군 병참지원을 허용한 것으로 지난해 관련법이 일본 국회를 통과했다.

북한의 미사일 시험발사와 공작선 영해 침범은 내부 정비와 함께 첨단장비 도입으로 이어졌다.

유사법제 정비 움직임이나 특수부대 창설 검토, 전역미사일방위(TMD)연구와 정찰위성 도입은 그 예다. 또 다시 큰 국제적 위기가 온다면 일본은 塵?헌법의 굴레를 송두리째 벗어 던질 가능성도 없지 않다.

현재 국회에 헌법조사회가 설치돼 있는 데다 안보문제는 방향이 한번 정해지면 가속도가 붙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도쿄〓오영환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