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신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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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반면 공휴일 오전의 한적한 도로에 긴긴 정지신호가 맥없이 이어질 때가 있다. 마침 앞의 택시가 신호가 바뀌기 전 과감하게 유턴을 감행한다. 안 그래도 옆 골목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는 마음에 안타깝던 운전자는 얼떨결에 따라서 돈다. 이때 어디선가 단속차량이 경광등을 밝히며 쏜살같이 나타난다. 그것도 앞차는 보내고 뒤차만 단속한다. 왜 나만 단속하느냐고 무기력한 항변 한번 해보지만, 돌아오는 건 여유 있는 미소와 함께 위반차량을 전부 단속할 수는 없는 거라는 느물느물한 답변뿐이다. 운전자는 신호위반을 한 것은 사실이기에 순순히 범칙금을 감수하지만, 뭔가 속은 기분이라 영 개운치 않다. 그런 함정단속에 대한 배신감은 꽤 오래간다.

전에 검찰총장이 새로 부임하면서 왜 검찰이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하는가에 대해 내부의견을 모았다는 보도를 본 적이 있다. 표적수사·편파수사의 논란을 불식하기 위해 별건수사·압박수사를 지양하고 신사적인 수사를 하겠다고 했다던 기사도 있었다.

최근 국세청 고위직의 수억원대 그림 강매 의혹으로 불거진 사건이 확대일로에 있다. 당초에는 막강한 세무조사권을 가진 국세청 국장이 자신의 부인이 운영하는 갤러리를 통해 세무조사 대상 기업들에 그림을 고가에 강매함으로써 사실상 뇌물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이제는 그가 알아선 안 될 고위층 관련 사실을 알게 된 바람에 탄압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대장금 드라마가 되살아난 듯한 이야기라 진실게임의 끝이 무엇인지 혼란스럽다. 하지만 ‘수억원’이니, ‘그림매매’니 하는 단어들을 보며 세무권력의 막강함을 다시 한 번 추측하게 된다.

‘절대권력은 절대부패한다’는 말이 생각난다. 예전에는 정치권력을 두고 하던 말이었지만, 세상 바뀌니 이제 절대권력이 남아 있는 거의 유일한 곳이 세무부서라고도 한다. 봉급생활자들을 제외하고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세무조사만큼 두려운 것이 또 있으랴. 그런데 그러한 막강권력을 앞세운 전면적 세무조사로 걷히는 세금이 생각보다 그리 많지는 않다고 한다. 오히려 세무조사 과정에서 누수되는 부분이 더 크다는 의혹도 제기된다. 물론 국가는 누수를 무릅쓰고라도 세무조사권 발동을 선호할 수 있다. 일단 걷히니까.

얼마 전 사석에서 세무조사가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사실 국민들도 정당하게 세금 내면서 사업하고 싶다. 그런데 오래전의, 세금탈루가 일반적 현상임을 전제하고 매겨진 과도한 세율 때문에 규정대로 세금 내고 나면 수익을 내기가 불가능할 지경이다. 신용카드 사용이 일반화되고 돈거래가 모두 드러나는 세상이다. 게다가 우리 사회에는 준조세도 많다. 이러한 현실을 감안, 세율을 조정해 주면 국민도 떳떳하게 세금 내고 싶다”는 의견이 많았다.

반면 “국민은 절대 자발적으로는 세금을 제대로 내지 않으려는 게 현실이다”는 의견도 있었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내년부터 소위 ‘세파라치’를 동원해서라도 세원을 전면 포착할 계획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국가가 그렇게 자기 국민을 믿지 못하느냐, 꼭 그런 방법을 동원해야 하느냐”는 반론이 다시 제기되었었다.

수년 전의 ‘카파라치’가 생각난다. 교통법규 위반 차량을 신고하면 보상금을 준다니까 아예 직업 삼아 카메라를 들고 잠복하던 이들이 성황을 이루었었다.

제도의 취지가 악용되었던 사례다. 국민이 서로를 감시하고 고발하는 방법을 동원하는 것은 그 효과가 우수하다 해도 문제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함정단속에 대한 배신감은 국가에 대한 실망으로 이어진다. ‘내가 번 만큼 내야지’ 하며 내는 세금과, 원망과 울화가 가득 찬 채 ‘운수 사나워 뜯겼다’며 내놓는 세금은 차이가 있다. 세금 제대로 거두어 나라살림 잘 하는 건 중요하다. 하지만 세율이나 세법 등 제도의 정비를 통해 정공법으로 풀어갈 일이다.

세파라치나 세무조사의 위협으로 몰아붙일 것은 아니다. 그런 방법을 수시로 동원하는 것은 ‘부패’라는 부작용도 문제거니와 국가에 대한 신뢰가 손상되는 지름길일 수 있다.

김영혜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