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포커스] 작은 승리, 큰 패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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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이번 선거는 참 묘하게 됐다. 양쪽이 서로 승리했다고 주장할 수도 있고 또 패배했다고 평가받을 수도 있다.

한나라당은 과반에 근접하는 제1당을 유지했으니 이겼다고 말할 수 있고, 민주당 역시 현재보다 근 20여석이 늘었고 전통표밭인 호남 이외의 지역에서도 선전했으니 전체적으로 이겼다고 주장할 수 있다.

반면 한나라당은 수도권과 중부지역의 패배로 영남지역을 제외하면 사실상 진 것이고 민주당도 사상 유례없는 금권.관권선거와 선거정략의 냄새가 나는 남북정상회담 발표라는 무리수로 얻은 결과라는 점에서 패배한 선거라고도 말할 수 있다.

앞으로의 정국은 양면성을 지닌 이같은 선거결과를 양당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둘 다 승리를 주장할 경우 정국은 끝없는 대결구도로 나갈 것이다.

민주당은 이번 선거를 정권에 대한 신임이라고 해석하고 무리한 과반수를 만들어 남은 임기의 정국 주도권을 쥐려 할 것이다.

반면 한나라당도 어려운 조건에서 이 정도면 국민의 지지가 자기들에게 있는 것이 확인됐다며 이 정부와 사사건건 대립해 나갈 것이다. 사실 이 정도의 의석 차이라면 국회에서 여당 단독으로 안건을 처리하기 어렵게 되고 결국 이 정권의 남은 임기는 국회가 발목을 잡아 아무 것도 못하는 지경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양당이 이 선거를 각각 겸허하게 패배로 수용할 경우 어떻게 될 것인가. 루스벨트 대통령의 급서로 부통령에서 대통령이 된 민주당의 트루먼은 1946년 중간선거에서 패배해 공화당이 상.하 양원의 다수당이 되었다.

루스벨트의 장기집권에 익숙해 있던 트루먼 대통령은 공화당과 대결구도를 택했다. 이 시기인 미국의 80회 국회는 '아무 일도 못한 국회( Do-Nothing Congress)' 로 정평이 나 있다.

의회가 제안해 통과시켰으나 대통령이 비토한 법안이 2백50건에 달했고 대통령이 제안한 법안은 21개 가운데 고작 7개만 통과됐다. 당시 트루먼 정부엔 '타율 0.333의 정부' 라는 별명이 붙었다.

클린턴 대통령도 94년 중간선거에서 패배해 트루먼과 똑같은 상황이 됐다. 당장 정국운영도 어렵게 됐지만 96년 재선도 불투명하게 됐다.

클린턴이 선택한 길은 트루먼과는 정반대의 길이었다. 그는 패배를 인정하고 공화당과 협조의 길을 택했다.

선거 다음날 그는 "유권자들이 지난 2년 동안 우리가 이뤄온 변화에 대해 만족하지 못한 것" 이라고 인정하고 앞으로 공화당의 지도부와 손을 잡고 변화를 계속해 나가겠다고 발표했다.

실제 그는 공화당이 선거이슈로 내세운 세금감면.정부지출축소 등을 과감하게 수용했다. 공화당과 비교할 때 복지정책 확대 등 큰 정부를 지향하는 민주당으로선 상상키 어려운 균형예산안을 행정부가 앞장서서 제출했다.

당시 정치평론가들은 이를 보고 "최악의 대통령직" "이미 재선의 기회를 상실했다" 는 식으로 평가절하했다.

반대로 공화당은 승리에 자만하고 있었다. 이를 클린턴의 약세로 판단한 밥 도울 하원의장은 곧장 대통령후보 경쟁을 선언했다. 공화당은 자신들이 전통적으로 주장하는 균형예산을 민주당 행정부가 알아서 만들어 오는데도 꼬투리를 잡아 이를 의회에서 통과시켜 주지 않았다.

그 결과 행정부가 문을 닫아 행정이 마비되는 결과도 빚었다. 그렇다면 96년 대선은 어떻게 됐나. 승리를 자만한 공화당이 아니라 패배를 인정하고 타협과 화해로 나선 클린턴의 압승으로 끝났다.

한나라당이나 민주당 모두 이번 선거보다 다음 대선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한나라당이 승리감에 젖어 사사건건 정부 뒷다리만 잡아 3년 내내 일을 못하게 하면 다음 대통령 자리가 돌아올까. 김대중 대통령이 과반수를 만들어 지난 전반기처럼 밀어붙인다고 정권 재창출이 될까. 이번 선거 이후의 정국을 승리자의 교만한 자세로 가져갈 것인가, 아니면 패배로 인정하는 겸허한 자세로 임할 것인가는 각자의 선택에 달렸다.

작은 승리에 교만한 자는 큰 전쟁에서 실패한다는 역사의 교훈을 잊지 않기 바란다.

문창극<미주 총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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