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가 있는 아침] '트렁크 나라에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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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경(1961~ )'트렁크 나라에서'부분

도대체 재봉되지 않은 하느님은
어디에 사는 걸까
트렁크 가득 옷을 실은 봉고차가
'우선 멈춤' 앞에
우선 멈춤, 하고 섰다
옷이 너무 많아
옷이 물이 된 트렁크 나라에서
옷의 노래는 더욱 붉어가고
옷이 너무 많은 트렁크 나라 사람들
새옷의 족보를 위해
더 많은 트렁크를 만들 궁리를 한다
트렁크처럼 몸을 움츠렸던 봉고차가,
순간 재봉된 트렁크 길을 따라
재봉할 트렁크 얼굴을 찾아 떠난다.
(중략)
겨울 오후, 드디어 게르마늄 물기를 머금은
하얀 눈들이 쏟아진다
재봉하고 남은 저 흰 너겁들
도대체 아직 재봉되지 않은 하느님은
어디에 사는 걸까



자본주의 속성인 소비재와 상업성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깔려 있다. 기성품화된 사회 속에서 하느님마저 기성품으로 전락한 이 시대 삶의 문제성을 제기한다. '겨울 오후, 드디어 게르마늄 물기를 머금은/하얀 눈들이 쏟아진다/재봉하고 남은 저 흰 너겁들!'

송수권<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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