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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봉선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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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20세 청년 홍난파가 부관연락선에 몸을 싣고 현해탄을 건넌 것은 1918년의 일이다. 그의 짐꾸러미 속에는 서울 장안에 두세 대밖에 없다던 바이올린이 고이 모셔져 있었다. 난파는 일본 최고 권위의 관립 도쿄음악학교(현 도쿄예술대학)에 들어가 1년 과정의 예과를 마쳤다. 하지만 그는 이듬해 본과 진학을 포기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세브란스 의전을 중퇴하며 결연한 각오를 품고 떠났던 유학을 왜 중도 포기했을까.

훗날 난파는 “모처럼 들어갔던 도쿄음악학교만 하더라도 만세통에 튀어나오지만 않았던들 관립학교란 간판 밑에서 대도를 횡보했을 것”이라고 회고한 적이 있다. ‘만세통에’란 표현이 1919년 3·1 운동과 관련 있음을 짐작하게 하지만, 난파에게 친일파란 주홍글씨를 새기려는 인사들은 근거가 뚜렷하지 않다며 배척한다. 하지만 바이올리니스트 시노자키 히로쓰구의 회고는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그는 학창시절 난파와 함께 하숙을 했던 사이다.

“어느 날 난파가 애지중지하던 바이올린을 전당포에 잡혔다. 그 돈을 다른 조선인 유학생에게 맡겨 독립운동 전단을 만드는 데 보탰다. 이 사실이 발각되는 바람에 그는 본과에 들어갈 수 없었다.” 시노자키는 지금 이 세상 사람이 아니지만, 그와 교분이 깊었던 재일동포 바이올린 명장(名匠) 진창현씨는 여러 차례 얘기를 들었다고 기자에게 말했다.

43년의 짧은 일생 가운데 적어도 39세까지는, 홍난파는 굳이 편을 나누자면 반일의 편에 섰다.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72일간 옥고를 치르고 고문을 당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 사상전향서를 쓴 사실과, 이광수·최남선 등이 쓴 친일 시 3편에 곡을 붙인 게 두고두고 시빗거리를 제공하는 그의 친일 행적이다. 자연인 홍난파에게 왜 초인적인 의지로 고문을 견디며 끝까지 버티지 않았느냐고, 그래서 왜 ‘홍난파 열사’가 되지 못했느냐고 따지는 건 너무 잔인한 일이 아닐까.

한·일 강제병합 100주년이 다가오면서 또다시 친일 시비가 분분하다. 난파의 후손들과 친일진상규명위원회 사이엔 법정 분쟁까지 붙어 있는 모양이다. 밝힐 건 분명히 밝혀야겠지만 난파를 평가할 땐 그의 친일과 반일 행적, 그리고 아무도 부정 못할 예술가로서의 업적을 함께 저울에 올려야겠다. 천상의 난파는 후손들이 벌이는 소동을 내려다보며 자신의 삶을 어떻게 반추하고 있을까. 오늘따라 봉선화의 바이올린 선율이 더욱 처량하게 들린다.

예영준 정치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