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술 사든지 신고 말든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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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뭐하러 신고를 해서 표만 날려부런다요. "

경합이 치열한 전남 해남-진도의 어느 후보 선거사무소에 전화가 걸려왔다.

격앙된 목소리의 주인공은 지역연락소를 담당하는 운동원이었다.

화가 난 이유는 간단했다. "우리쪽에서 못해주면 가만히나 있지, 왜 상대편 후보가 주민들에게 술과 음식을 주는 것을 신고했느냐" 는 것이었다.

전화를 받은 사무국장은 당혹스런 표정이 됐다.

"불법 향응을 베푼다는 제보를 받았으니 당연히 선관위에 신고해야 하는 것 아니냐" 고 설명했다.

그런데 연락소 책임자의 대답은 전혀 뜻밖이었다. 이야기인즉 오히려 표를 잃게 생겼다는 것이다.

선관위 단속반에서 신고를 받고 출동하자 술상을 앞에 둔 마을사람들이 부끄러워하기 보다 언성을 높였기 때문이다.

"모처럼 술 한잔 먹으려고 하는데 이런 걸 고발하느냐. 당신때문에 술판이 깨졌다" 고 하더라는 것이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사무국장의 태도는 달라졌다. 불법 선거를 한다는 제보가 들어와도 신고할 엄두가 안난다는 것이다.

함께 불법을 저지를 수도 없고 신고할 수도 없으니 그야말로 '진퇴양난' 이라고 하소연한다.

"게다가 일부 주민은 일부러 누구를 지지하는지를 밝히지 않아요. 양쪽에서 다 대접받기 위해서라고 봐야지요. "

호남의 '최대 격전지' 라고도 불리는 이 지역의 부동층은 30% 정도다.

불법 선거와 관련해 이 지역 선관위 사무실로 걸려오는 신고전화는 하루 20통이 넘는다.

후보 역량이나 정책보다 행여 '술 한잔' 이 당락을 좌우하는 선거가 재연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백성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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