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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년 만에 다시 목조 상량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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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목조 광화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국전쟁 때 불탄 뒤 반세기가 훨씬 지나서다. 1968년 중건(重建) 때 콘트리트로 지었던 누각이 매끈한 금강송 목재로 뼈대를 갈아입었다. 일제 조선총독부 청사에 맞춰 비뚤어졌던 중심축과 위치도 바로잡았다. 가림막이 걷히면 경복궁의 늠름한 정문으로서 세종로를 마주 보게 된다.

복원 공사가 진행 중인 광화문이 27일 상량식을 치렀다. 2006년 12월 ‘경복궁 광화문 제 모습 찾기’ 선포식 이후 3년 남짓 만이다. 상량식은 전통 건축의 하이라이트 행사다. 광화문 복원이 클라이맥스에 오른 셈이다. 도편수 신응수(67) 대목장은 “등산으로 치면 8부 능선을 넘은 셈”이라고 말했다.

경복궁의 얼굴 광화문이 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27일 광화문 상량식에서 행사 관계자들이 오색 천을 잡아당겨 장여를 들어올리고 있다. 문화재 관계자 등 200여 명이 참석한 이날 의식은 축문을 읽고 잔을 올리며 절을 하는 등 30분 남짓 진행됐다. [최승식 기자]

◆가림막 속 목조 광화문=이날은 144년 전인 1865년 11월 27일(음력 10월 11일) 고종이 광화문을 중건한 날과 같은 날. 조선시대 국조오례의에 따라 종묘제례보존회가 의식을 거행했다. 독문관(讀文官)이 ‘광화문 복원 상량문’을 읽자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이건무 문화재청장, 신응수 대목장이 함께 상량문을 함에 봉안했다. 상량문은 광화문이 조선 태조 4년(1395)에 건축돼 네 차례 중건하기까지 경위와 복원 의의를 적은 일종의 ‘블랙박스’다. 김양동 계명대 서예과 석좌교수가 길이 75㎝의 두루마리 한지에 썼다.

하이라이트는 처마지붕 용마루를 받칠 마룻도리를 올리는 일. 관계자들이 오색 천을 잡아당기자 도르래에 연결된 우람한 목재가 천천히 들렸다. 마룻도리 아래 놓일 장여다. 길이 8.5m, 무게 130㎏에 이르는 장여가 문루 꼭대기 한가운데 자리를 잡자 목수들이 도르래를 풀었다. 이어 목수 10여 명이 양쪽에서 마룻도리를 들어 장여 위에 얹었다. 우레 같은 박수가 터졌다.

◆뒤틀린 역사 바로잡기=조선 태조 4년(1395) 지어진 광화문은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가 고종 2년(1865) 경복궁과 나란히 중건됐다. 일제가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으면서 위치가 옮겨졌고 한국전쟁 때 목조부가 소실됐다. 68년 중건 때도 당시 중앙청사(옛 조선총독부청사)와 평행을 맞추기 위해 고종 때 원래 위치에서 북쪽으로 11.2m, 동쪽으로 13.5m, 경복궁 중심축에서 3.75도 틀어졌다. 공사를 지휘한 신 대목장은 “광화문은 여느 공사와 달리 제 위치를 찾아 복원하는 것이었기에 고증 과정이 제일 어려웠다”고 했다. 유 장관은 “우리 전통·역사 전반에서 비틀어졌던 것을 바로잡는 일의 시작”이라고 평가했다.

이날 상량식을 치른 광화문은 문루 목공사(2010년 3월)와 상·하층 지붕 공사(5월), 문루 단청 공사(8월), 가설덧집·설치미술을 철거(9월)한 뒤 2010년 10월 달라진 모습을 드러낸다. 현판은 1900년대 초 사진을 근거로 하여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디지털 복원기술로 원형 복원할 예정이다.

글=강혜란 기자
사진=최승식 기자

◆상량(上樑)=전통 건축에서 기둥을 세우고 들보를 얹은 다음 마룻도리를 올리는 일. 술과 떡을 돌리며 목수의 노고를 치하하고 남은 공사의 안녕을 기원한다. 공사 개요·의의 등을 적은 상량문을 상량함에 봉안하고, 이를 맞춰 끼운 장여를 건물 최상단에 올린 다음 마룻도리를 얹는 절차로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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