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유가 남아돌아 국내 낙농가들이 힘들어하고 있다. 고심 끝에 회사 사정이 조금 어렵더라도 남는 우유 문제를 해결하고자 자연치즈 공장을 세웠다." 김 회장은 일본에서 와인 붐이 일면서 자연치즈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했던 사례도 참조했다고 덧붙였다.
김 회장은 1946년 고향인 함남 북청에서 월남했다. "공산당이 꼴 보기 싫어서"였다. 생계가 막막해 서울 방산시장에서 좌판을 벌였다. 실향민 특유의 억척스러움에 납기.품질 약속을 꼭 지킨다는 평판을 바탕으로 사업을 늘려갔다. 제분업과 해외 무역으로 제법 큰 돈을 벌었다.
71년 정부로부터 한국낙농가공주식회사(매일유업의 전신) 인수를 제안받았다. 당시 국내 시장은 미미했고 김 회장은 낙농업에 대해 아는 바도 없어 고민이 많았다. 그때 북청농업학교 시절 꿈꿨던 '잘사는 농촌 건설'이란 이상이 불현듯 생각났다고 한다.
김 회장은 "기업가는 사회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점에서 '장사꾼'과 다르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기업의 가장 큰 책임은 고용이며, 기업이 사람을 고용할 때 두려움을 느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현실은 "노사갈등이 격해지고 임금이 올라가 기업 환경이 나빠지면서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기 힘들어졌다"고 했다. 이에 따라 기업들이 자동화나 중국 진출 쪽으로 눈을 돌리며 고용상황이 더 악화됐다는 것이다. "결국 사회 불만이 높아지고, 기업에 대한 반감이 커지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고 김 회장은 진단했다. 따라서 원만한 노사관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했다.
반기업 정서에 대한 우려도 나타냈다. "우리 기업은 국내에서만 환영 못 받는 것 같다. 내가 해외에 투자할 의도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고선 미국.호주 같은 선진국에서 사람을 보내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더라." 그는 "돈 많이 버는 것은 사회에 환원할 것이 많다는 것"이라며 "돈이 많다는 이유로 기업가를 부정하거나 비난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김 회장의 고언은 계속됐다. "쉰이 넘어 매일유업을 경영한 뒤 낙농가의 이익을 우선으로 생각했다. 최근 농업시장 개방을 두고 농업계의 반대가 만만치 않다. 그러나 시장의 문을 닫게 되면 우리 모두가 죽는다. 지금 우리를 이만큼 만든 것도 수출 덕분이다. 농업계는 정부만 바라보면 안 된다. 어렵더라도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찾는 데 힘을 모아야 한다."
이철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