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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의회 진출한 '거리의 투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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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 ‘거리의 투사’ ‘긴 머리(長毛)’ 등 다양한 별명을 가진 홍콩의 노동운동가 량궈슝이 당선이 확정된 13일 환한 표정을 짓고 있다. [홍콩 AP=연합]

홍콩 정치판에서 '거리의 투사'로 불리는 량궈슝(梁國雄.49)이 마침내 입법회(의회 격)에 들어갔다. 서민층 밀집 지역인 신제(新界) 동구(7개 의석)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14.1%(6만925표)를 얻었다. 이 지역구에선 민주파 정당의 내로라 하는 스타 정치인과 자유당의 톈베이쥔(田北俊)주석이 당선됐다. 고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인 그의 당선은 최대 이변으로 손꼽힌다. 홍콩에선 여야를 막론하고 명문가 출신 또는 외국 유학을 다녀온 전문직종 출신이 아니면 입법회 의원의 명함을 내밀기 어렵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4년 전의 입법회 선거와 지난해 구(區)의회 선거에 나가 고배를 마셨다. 량궈슝은 당선이 확정된 뒤 "표를 찍어준 유권자들의 마음을 항상 잊지 않고 '내 방식'으로 싸워나가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친중파 정당과 둥젠화(董建華) 행정수반, 또 베이징(北京)의 중앙 정부엔 무척 껄끄러운 존재다. 2002년 7월 1일 홍콩 회귀(回歸) 5주년을 맞아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이 홍콩을 방문했을 당시 검은 관을 메고 나가 시위했다. 그가 만든 '사오(四五)행동'이란 좌파 단체는 정치 쟁점이 생길 때마다 치열한 가두 투쟁을 벌인다. 선거자금 40만홍콩달러(약 6000만원)도 대부분 거리에서 모았다.

노동운동을 했던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그는 고교 시절부터 30여년간 '운동'을 하며 불법 시위.집회 등으로 세 차례의 옥살이를 했다. 그는 "내가 지향하는 것은 민주화와 사회주의"라고 말한다. 한때 '마오쩌둥(毛澤東) 사상'에 빠졌으나 1979년부터 공산당 일당 독재의 허구성을 깨닫고 반중(反中) 전선에 나섰다. "중국 공산당은 자유로운 정당 활동과 언론.출판.결사.집회의 자유를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스타일도 튄다. 중남미의 혁명가 체 게바라의 얼굴이 박힌 붉은색 티셔츠를 항상 입고 다닌다. 기존 질서에 대한 반항의 표시로 머리카락을 가슴 밑까지 기르고 다닌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장모(長毛.긴 머리)'다. 하지만 정치인으로 성공하려면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는 지난달 17일 외신기자클럽(FCC)의 후보 초청 토론회에서 "둥젠화 행정수반이 즉각 퇴진하고 홍콩의 정치체제를 결정할 국민투표를 실시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다가 다른 민주파 후보에게서 "현실을 모르는 어리석은 말"이라고 공격받았다.

그는 최근 반중 성향의 언론인들이"가족의 안전을 위해서"라며 잇따라 현직에서 물러나자 "나도 한밤중에 유.무언의 협박 전화를 받고 있다. 그래서 유서를 써놓고 다닌다"고 공개했다. "절대로 자살하지 않을 테니 만약 내가 죽으면 '살해'됐다고 판단하라"는 극언까지 했다. 친중 세력엔 이래저래 골치 아픈 존재가 아닐 수 없다.

홍콩=이양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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