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수이볜은…] 반체제 사건 변론하다 투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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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대만의 새 총통에 당선된 천수이볜(陳水扁.49)은 1951년 2월 남서부 타이난(臺南)현의 허름한 토담집에서 태어났다. 소작농과 방적공장 여공의 아들이었던 그는 가난 때문에 점심을 거르기 예사였다.

공부만이 탈출구라고 믿은 陳은 초등학교를 전국 1등으로 졸업했다. 69년 국립 대만대학에 입학, 3학년 재학 중 최우수 성적으로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유명 해상법 전문회사에 들어간 그는 정치엔 별 관심이 없었다.

부유한 의사 가문의 딸과 결혼(76년)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러나 79년 반체제 운동과 관련된 '메이리다오(美麗島)사건' 의 변론을 맡은 것이 인생을 바꿔놓았다. 당시 피고인 중의 한사람이 바로 이번 총통선거에서 그의 러닝메이트였던 뤼슈롄(呂秀蓮). 변론을 맡으면서 陳자신도 민주화운동의 신봉자가 됐다.

이후 정치에 본격 입문, 81년 타이베이 시의회 의원이 됐다. 85년 펑라이다오(蓬萊島)라는 반체제 잡지 제작에 참여한 혐의로 8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지만 89년과 92년 입법의원 선거에 연속 당선되는 등 비교적 순탄한 정치행보였다.

특히 94년 12월 43세로 타이베이 시장에 당선되면서 陳은 차세대 지도자로 떠올랐다. 열정적으로 주민 서비스에 힘쓰며 고(故) 장제스(蔣介石)총통의 저택 택지 일부가 시유지인 점을 들어 반환을 요구하는 등 원칙론자로도 이름을 날렸다.

반면 퇴폐이발소와 매춘 등 '8대 업소(八大行業)' 일소 정책은 관계자들을 적으로 만들었다. 이들은 국민당과 단결해 98년 타이베이 시장선거에서 그의 재선을 막는데 성공했으나 결과적으로는 陳을 총통선거에 도전하게 만든 셈이 됐다.

지한파(知韓派), 혹은 친한파(親韓派)로 알려진 그는 95년 경남대에서 명예 법학박사학위를 받기도 했다. 그는 또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정치투쟁을 본받아야 한다" 고 종종 말하며 "양안관계 개선뿐 아니라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태평양 국가들과의 우호관계 유지도 중요하다" 고 강조해왔다.

陳이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에 참여, 한.대만간 복항(復航)문제에 적극적인 자세를 갖고 있는 것도 陳정권의 출범 이후 한.대만 관계가 잘 풀려갈 것이란 분석을 낳게 한다. 대학시절에 알게 된 부인 우수전(吳淑珍.49)과의 사이에 딸 싱위(23)와 아들 즈중(致中.19)을 두었다.

부인 吳는 15년전 정치테러로 의심되는 교통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돼 지금도 휠체어 생활을 하고 있다.

김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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