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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에드워드 홀 '문화를 넘어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7면

천재 수학자 노베르트 위너(1894~1964)는 죽기 직전 자신의 뇌가 낳은 자식, 즉 컴퓨터의 위험성을 알아채고 "그것을 인간사에 너무 깊숙이 개입시키지 말라" 는 말을 남겼다.

컴퓨터 뿐인가. 자동차가 또다른 기계적 체계로 도시와 시골의 생활환경, 깨끗한 공기, 건강한 신체 등을 잠식해가고 있고 최첨단 문명의 이기(利器)인 휴대폰은 소음 덩어리로 변해 우리 삶을 짜증나게 만든다.

인간은 스스로 만든 세상이란 멍에에 목이 매여 끌려다니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은 인간을 '시장의 파리떼' 로 바꿔놓는 거대한 기계란 말까지 나온다. 문명의 이기에 눌린 인간은 자본주의 시장논리에 쫓기면서 자기 자신을 돌아볼 기회조차 빼앗기고 살기 때문이다.

문화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의 '문화를 넘어서' (원제:Beyond Culture.최효선 옮김.한길사.1만2천원)는 이처럼 인간이 자기 외부의 연장물(延長物), 즉 인간이 생산해낸 물질적 산물들을 진화시킴으로써 자신의 약점을 보완해 왔고 그것이 다름 아닌 문화란 이름으로 불린다고 말한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이 진화시킨 연장물의 구속이 자신을 구속한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 문화의 지배를 받게 됐다고 보고 있다. 그러니까 인간은 스스로의 족쇄에 매여 허우적대는 존재라는게 홀의 시각이다.

인류가 스스로를 억압하고 있다는 증거는 또 있다. 일상생활에서 뿐 아니라 민속.종교.철학.제도 등에서도 발견된다.

이 억압 과정은 의식적인 통제가 미치지 않는 내면 깊숙한 곳에서 진행되는데 홀은 프로이트가 말한 "인간이란 종은 자기를 희생하지 않고는 진보하지 못한다" 는 말에 동감을 표시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홀의 문화인류학적 탐구는 인간의 상실되고 소외된 본연의 자아를 다시 찾는 일로 모인다. 즉 문화의 속박을 풀기 위해 우리가 해야할 노력에 관한 것들이다.

그 노력이란 자신을 진정으로 알고자 하는 일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무의식 속에서 자신을 얽어매는 문화적 습관을 읽어내 새로운 습관으로 개선시킬 수 있는 자발성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머리로 쓰는 학자가 아니라 발로 쓰는 학자라 불리는 홀은 미국 동서부 푸에블 문화권에서 유럽과 중동에까지 이르는 광범위한 현지조사(field work)를 단행한 것으로 이름높다.

그러나 '문화를 넘어서' 는 현지조사에 관한 서술보다 조사에서 얻은 생물학.심리학적 지식을 근거로 인간이란 유기체의 독특한 구조를 설명하고 개선점을 제시한다.

특히 문학인류학을 근간으로 언어학.사회심리학.교육학은 물론 동물행동학.유전학 등 자연과학까지 도입해 분석하는 그의 접근방식은 독자층을 넓게 하는 토대가 된다.

그의 시선 중 돋보이는 부분은 학교 바라보기다. 새로운 자발성을 위해 허물어뜨려야 할 것이 바로 학교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홀은 미국의 교육이 지식의 단편화를 지향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시계와 달력에 의해 움직이고 관료적인 성격을 주로 키우면서 승자와 패자를 가리는 이 게임에는 희망이 없다.

그는 "예정된 시간표에 따라 획일적으로 아이들을 책상에 잡아두는 것은 하루에 1백마일을 달릴 수 있는 영장류를 대접하는 도리가 아니며 거의 미친 짓이나 다름 없다" 고 주장한다. 미국의 학교가 그러하다면 우리의 현실은 더욱 답답한 노릇이다.

홀을 읽는 입문서로 꼽히는 '문화를 넘어서' (76년)는 저자의 문화인류학 4부작으로 기획된 것으로 '침묵의 언어' (59년)와 함께 출간됐다.

곧 '생명의 춤' (83년) '숨겨진 차원' (66년)도 나올 예정이다. 이 저작들은 문화의 속박 풀기, 문화 커뮤니케이션의 이해라는 큰 주제로 묶여 있는 글들이다.

신용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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