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알 될뻔했다 황금알 되어 왔다 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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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거물의 귀환’이라는 드라마의 주인공이 된 박희태(71) 전 한나라당 대표. 뜨거웠던 10월정국을 뒤로 하고 그가 다시 여의도로 돌아왔다. 돌연 한나라당 대표직을 벗어 던지고 경남 양산으로 발길을 옮겼던 박 전 대표는 10·28 재·보궐선거를 통해 다시 ‘금배지’를 달고 당당히 원내에 진입했다.

“낙선 땐 보따리 싼다는 각오로 뛰었다” # 대표직 던지고 ‘양산상륙작전’ 성공“어렵사리 따냈으니 겸허히 6선 값어치 하겠다”

이로써 전 당 대표, 재·보선 후보라는 호칭을 떼고 국회의원이라는 직함을 얻어 정몽준·이상득 의원과 함께 당내 최다선인 ‘6선’의원 대열에 합류했다. 그러나 6선 명단에 이름을 올리기까지 박 의원이 거쳐온 여정은 ‘험난’했다.

지난 18대 총선에서 뜻밖에 낙천하며 정치적 시련을 맛봤고, 재도약의 계기로 전당대회를 통해 당 대표에 선출됐지만 ‘원외 대표’라는 불편한 꼬리표를 달아야 했다. 집권 여당의 대표로서 치른 지난 4·29 재·보선에서는 5 대 0 참패를 당해 대표 ‘퇴진론’에 직면하기도 했다.

양산 출마를 위해 대표직에서 물러나는 과정에서부터 이번 10·28 재·보선을 치르기까지 그가 겪은 고초 또한 적지 않았다. 9월 기자회견을 통해 대표직을 떼고 본격 선거전에 돌입했지만, 뜻하지 않게 선거캠프 자원봉사자의 불법선거운동 논란이 불거지는가 하면, 선거운동 첫날 경찰이 민주당 송인배 후보 측 선대본부장의 자택을 압수수색해 ‘야당탄압’ 공세에 휘말리기도 했다.

또 선거 하루 전날에는 양산시민 3000여 명이 한나라당에 입당하면서 막판 잡음에 시달렸고, 무엇보다 출신 지역이 경남 남해라는 점에서 ‘낙하산공천’이라는 핸디캡을 떠안아야 했다. 특히 “정치적 모험이 될 수 있다”는 주변의 만류도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그래서일까? 결과는 천신만고 끝에 거둔 박 의원의 ‘신승(辛勝)’이었다.

박 의원은 3299표, 득표율 4.08%포인트라는 비교적 근소한 차이로 끝까지 맹추격한 민주당 송 후보를 제치고 양산지역구를 차지했다. 뜻대로 당선은 됐지만, 한나라당 텃밭에서 어렵게 승리한 박 의원의 입장에서 보면 이번 선거가 썩 매끄럽지는 않았다.

국회 본회의장 연단에서 의원선서를 마친 다음날인 11월3일 한창 사무집기를 정리 중인 의원회관 215호에서 박 의원을 만났다. 두 달여 동안 선거전에 몰입했던 탓일까? 다소 피곤해 보였지만, 이번 선거 이야기부터 꺼내자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 포문을 열었다.

‘큰 양산 발전론’ 승부수

-어제 당선인선서를 하셨는데, 우선 심정이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웃음) 어째 좀 덤덤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선서 직후에는 속으로 ‘이제 내가 새로운 책무를 다해야겠구나’ 하고 거듭 생각했습니다.”

-선서를 마치고 연단을 내려오면서 장내에서 폭소가 터진 에피소드가 하나 있었습니다. 김형오 국회의장에게 예를 표하지 않아 지적받았는데, 그때 기분이 어땠습니까?

“아무래도 연단에 올랐던 것이 오래돼서 그랬지 않았나 싶습니다.”(웃음)

-잠시 선거 이야기를 했으면 합니다. 결과적으로 초반 우세에서 막판 접전으로 매듭지어졌습니다. 민주당 송인배 후보의 추격에 당황하지 않았습니까?

“솔직히 말하면, 개표 초반에는 조금 당황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중반까지 제가 여유 있게 앞서간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양산지역에서 (한나라당이) 져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안심하고 있었습니다.”

-의외로 표 차이가 크지 않았습니다.

“후반에 상당히 따라왔다는 것은 알았지만, 어느 순간 주춤하더라고요. 그리고 당 대표로서 그 동안 열심히 이명박정권을 뒷받침하고 경제 살리기에 몸 바쳐 일해왔기 때문에 (민심이) 잘 평가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양산지역이 한나라당 텃밭이기는 해도, 박 의원의 텃밭이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지난 5선 모두 지역구인 남해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양산지역의 민심을 얻기가 쉽지 않았을 듯합니다.

“물론 그런 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승부수로 던진 것이 ‘양산 발전론’입니다. ‘과연 후보 가운데 누가 양산을 발전시킬 수 있겠느냐’는 점을 부각시켰고, ‘힘 있는’ 여당 후보를 지지해달라고 호소했습니다. 특히 저는 당 대표도 지냈고, 이번에 당선되면 6선 의원이 되기 때문에 막강한 힘을 얻을 수 있는데, 그 힘을 양산에 바치겠다고 했습니다. 제가 내건 공약이 바로 ‘큰 양산’ 발전입니다.”

-선거를 치르면서 가장 부담스러웠던 것은 무엇입니까? 혹시 고령이기 때문에 체력적인 문제는 없었습니까?

“양산에 내려가 있었던 시간이 두 달 정도 됩니다. 두 달 동안 단 하루도 쉬지 않고 뛰어다녔습니다. 체력은 전혀 문제되지 않았어요. 다만….”

박 의원이 뭔가 말하려다 멈췄다. 대체 그것이 무엇일까? 박 의원은 잠시 후 17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던 김양수 전 의원을 언급했다. 김 전 의원은 박 의원에게 밀려 낙천하고 한나라당을 탈당해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이번 선거에서 박 의원이 고전했던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김 전 의원이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젊은 표를 챙겨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 의원은 짧게 김 전 의원을 격려하면서 부담스러웠던 부분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답을 피했다. 이어지는 박 의원의 말. “김양수 전 의원은 아직 젊기 때문에 앞으로 좋은 기회가 많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마든지 좋은 일이 찾아올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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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태 한나라당 전 대표가 11월28일 경남 양산 재·보궐선거 당선을 확인한 후 꽃다발을 받아들고 즐거워하고 있다.

총선 공천 탈락의 상처

다시 선거 결과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왔다.

-당선 직후 소감을 발표하면서 정몽준 대표의 리더십을 치켜세웠는데,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맞아요. 제가 칭찬했습니다. 제가 당 대표를 할 때 치렀던 재·보선에서 다 졌지만, 이번에는 3 대 2로 잘 마무리했잖아요?(웃음) 어쨌든 저보다 좋은 성적을 거뒀으니 좋게 평가한 것입니다.”

-당선을 가장 기뻐해준 사람은 누구입니까?

“특별히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저를 지지해준 모든 분이 기뻐해 줬어요. 아내는 여러 번째이니 겉으로는 크게 표시하지 않더라고요.”

박 의원이 양산 출마를 결심할 당시 주변에서는 ‘정치적 모험’이라며 만류하는 이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박 의원은 당 대표직을 사퇴하고 양산을 택했다. 정치생명을 걸고 선거판에 뛰어들 즈음 여의도에서는 “박 대표는 떨어지면 끝”이라는 말도 심심찮게 나돌았다.

-당 대표직을 내놓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선거 때가 되면 많은 후보가 없는 자리라도 만들어 직함을 하나 걸치고 출마하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사실 제가 출마할 때도 당 대표직을 그대로 유지해야 확실히 이길 수 있다는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야말로 모험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선 공천경쟁이 공정해지지 못하고, 두 번째로 대표직을 갖고 선거를 하면 당이나 정권에 큰 부담을 줄 수 있겠다 싶어 그만둔 것입니다.”

-대표직 사퇴를 만류하는 분들을 어떻게 설득했습니까?

“만일의 경우 제가 당 대표임에도 이번 선거에서 실패한다면 엄청난 충격과 타격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고민은 했지만 서둘러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실패를 가정한 결단이라고 하셨는데, 낙선을 염두에 두셨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낙선을 왜 해요?”라고 운을 뗀 박 의원은 이내 솔직한 심정을 털어놨다.

“물론 안 한 것은 아닙니다만, 그런 생각을 많이 하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낙선하면 그야말로 보따리 싸서 떠나야 한다는 생각은 했습니다. 물론 제가 지금도 변호사 간판을 걸어놓고 있습니다만, 낙선하고 변호사로 돌아가기에는 적절치 않더라고요. 그렇다 보니 좀 막막하기는 합디다.”(웃음)

-1년6개월여 만에 국회로 돌아왔는데, 사실 정치생명을 걸면서까지 출마를 강행한 박 의원의 속내를 궁금해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속내요? 자, 지난 총선 때 제가 자의로 그만둔 것이었다면 이번에 왜 다시 출마를 결심했겠어요? 그게 아니잖아요? 당시 제가 공천받지 못한 것을 두고 저를 아는 모든 분이 놀랐을 거예요. 어쨌든 그 후에도 저는 계속 국회의원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노력해왔고, 타의가 아닌 제 의지대로 다시 한번 국회의원이 돼서 정치인생을 마감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연스럽게 화제는 지난 총선 당시의 공천문제로 옮겨졌다.

-18대 총선 때 공천에서 탈락하고 굉장히 서운했을 듯합니다.

“황당하기 짝이 없었죠. 생각해 보세요. 저의 결격사유로 인해 공천에서 탈락한 것이 아닙니다. 무슨 이유인지 아직도 모르겠어요. 그 시점에 분 ‘광풍(狂風)’ 때문에 밀려났지만, 제가 공천을 못 받을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바로 그런 점을 국민이 이해해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공천이 잘못됐다는 것은 많은 국민이 알고 인정하는 부분 아닙니까? 그러니까 낙천한 사람들이 불복하고 입후보했을 때 당선시켜 줬잖아요?”

-혹시 사전에 낙천 소식을 듣지는 않았습니까?

“아뇨. 공천 발표 하루 전까지도 당이나 공천심사위원회 모두 저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결과가 그렇다 보니 일일이 물어보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고…. 화가 난다기보다 진짜 황당하더라고요. 그래도 어쩌겠어요? 참아야지요. 그런 억울함이나 분노를 내색할 수도 없었어요.”

-낙천 후 박 의원께서 당시 한나라당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지 않았습니까? 그때 기분도 썩 좋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러고 나서 며칠 지났는데 당에서 저한테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으라고 합디다. 정말 가슴에 아픔을 묻고 열심히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선거운동을 했습니다. 결과가 어땠습니까? 소선거구제가 실시된 후 20년 만에 처음으로 우리가 과반의석을 차지했잖아요?”

박 의원은 지난 13대에 지역구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한 후 17대까지 내리 다섯 차례 당선됐고, 이번 재·보선에서 당선돼 6선으로 18대 국회 최다선 의원이 됐다. 때문일까? 박 의원이 짊어진 과제 중 하나가 바로 당의 화합에 일조하는 것. 박 의원은 과연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을까?

글 오흥택 월간중앙 기자
사진 박상문 월간중앙 사진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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