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너 살고 나 사는 知力경쟁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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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우리는 밥이 아니라 경쟁을 먹고 살아간다. 밥 자체가 경쟁에서 얻은 것이기 때문이다. 개인은 물론이고 나라 전체가 그렇다. 그래서 국제경쟁 무한경쟁이란 말이 난무한다. 하지만 백년 전 개화기 때만 해도 우리 사회에는 '경쟁(競爭)' 이란 단어가 없었다.

설마 하겠지만 경쟁이란 말은 채인버가 쓴 경제학 책을 일본에 소개하려고 할 때 후쿠사와 유키지(福澤諭吉)가 '컴피티션' (Competition)이란 단어를 그렇게 번역한 것이다. 후쿠사와는 그 말뜻을 묻는 관료에게 이렇게 설명한다.

"두 상점이 나란히 있을 때 한쪽에서 물건값을 싸게 하면 사람들은 그 상점에만 모인다. 그러면 다른 상점에서도 지지 않으려고 그보다 더 값을 내린다. 그래서 서로 이기려고 힘을 쏟는 것을 경쟁이라고 한다."

그러자 관료는 "서양은 정말 무서운 사람들이 사는 곳이로구나. 아무래도 '爭' 자가 험해 보이니 상사에게 보일 수가 없다" 고 거절을 했다. 결국 후쿠사와는 그 책의 목차에서 '경쟁' 이라는 말을 삭제해 상사에게 제출했다는 것이다.

그 뒤 한 세기가 넘어 새 천년이 되었는데도 경쟁이란 말만 유행하고 있을 뿐 자유시장의 그 경쟁원리는 아직도 우리 몸에 제대로 밴 것 같지가 않다. 영어사전에서 '경쟁' 을 정의한 것을 보면 "서로 상대방에게 손상을 입히지 않고 한정된 같은 목적을 위한 사람들끼리의 사회적 대항관계" 를 뜻하는 것이라고 돼 있다. 그래서 경쟁이라는 말은 어원적으로도 라이벌과 같은 말이다.

라이벌은 같은 냇물을 마시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리킨 것으로 리버(강물)를 뜻한다. 강을 사이에 두고 이웃마을과 서로 텃세를 부리기는 해도 전쟁터의 적을 대하듯이는 하지 않는다.

더구나 강물이 오염되거나 마르면 다같이 죽는 삶의 공동체가 아닌가. 한마디로 '라이벌' (競爭者)은 '에너미' (敵)가 아니며 경쟁은 전쟁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라이벌과 에너미를 구별하지 못하는 오늘의 정치나 기업판을 보면 "경쟁이란 칼이 아니라 지력으로 하는 것이다" 라고 했다는 후쿠사와 자신의 풀이가 생각난다. 당시의 일본사회는 사무라이(武士)들이 칼로 세상을 좌지우지하던 시대였다.

상대방을 죽이는 칼의 싸움은 경쟁이 아니다. 왜냐하면 경쟁자를 칼로 쓰러뜨리면 경쟁자는 사라지고 말기 때문이다.

참된 경쟁, 자유로운 경쟁은 지력(知力)에서 나온다. 그래야만 경쟁이 치열할수록 그 사회와 나라는 평화롭게 발전된다.

그와는 반대로 경쟁을 없애기 위해서 경쟁자를 죽이는 사회와 나라는 제로 섬 게임이 되어 결국은 너 죽고 나 죽는 공멸을 부른다.

바둑을 두는 경쟁자를 적으로 간주해 죽여버리면 함께 바둑을 둘 사람이 없어져 버리고 바둑 자체의 판이 무너지고 만다. 그래서 경쟁은 이길 때보다도 질 때가 더욱 중요하다는 말이 생겨나게 된다.

'컴피티션' 이라는 말이 경쟁만이 아니라 능력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듯이 경쟁은 그 능력을 평가할 수 있는 자유롭고 공정한 룰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 어렸을 때 배운 이솝우화의 토끼.거북이의 경쟁도 생각날 것이다. 원래 토끼는 산에서 사는 짐승이고 거북이는 뭍에서도 살기는 하지만 주로 바다에서 사는 짐승이다.

그리고 토끼는 빨리 달리고 거북이는 느린 짐승이다. 핸디캡을 주지 않는 한 경쟁 자체가 무의미하다. 토끼와 거북이가 함께 살아가는 '토북이' 세상이 되려면 경쟁의 룰부터 바꿔야 한다.

잘 달리는 벨과 아이비엠을 그리고 이제는 마이크로소프트를 조인 서슬 푸른 그 독과점 금지법의 족쇄는 바로 토끼와 거북이의 부당한 게임을 막자는 데서 나온 것이다. 잘 되는 회사를 배 아파해서가 아니라 독과점으로 경쟁이 사라지는 사회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날이 갈수록 국회의원 선거가 혼탁해진다고 한다. 지식 사회가 온다는 새 천년의 국회 선거가 아닌가. 제발 국회의원 선거도 이제는 돈이나 연고나 정실 그리고 권모술수의 너 죽고 나 죽자의 싸움이 아니라 너 살고 나 사는 지력 경쟁이 되었으면 한다.

이어령 <새 천년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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