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법 戰士된 건‘문화가 국력’ 소신 때문”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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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대변인 계보 이어

서울시장 소문요? 아직은 부담돼요… 애들과 못 놀아줘 안타깝죠 #자유와 인권은 보수적 가치… “외모…판사 출신이…” 그런 말 들으면 못 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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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나 의원이 대변인을 하면서 거둔 성과도 있다. 나 의원의 표현대로 ‘기뻤던 순간’인데, 2007년 대선 승리에 일조한 것이다. 물론 선거기간에는 내부적으로 조율된 문구를 들고 국민 앞에 서지만, 대부분 나 의원의 머리에서 나온 논평과 해설이 많았다.

나 의원은 한나라당 명 대변인의 계보를 잇는 의원으로 꼽힌다. 박희태 전 대표가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까지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대변인을 했던 것처럼, 나 의원 역시 강재섭 전 대표가 “좋은 머리로 알아서 하라”며 대부분 믿고 관여하지 않았을 정도로 명석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곱씹어 보면 강 전 대표가 나 의원의 강한 책임감을 꿰뚫어 보고 대변인이라는 중책을 맡겼을지 모른다. 나 의원이 평소 생각하는 책임감은 과도할 정도다. 일 처리에서는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꼼꼼한 편이고, 사소한 약속까지 ‘무조건’ 지키려고 애쓰는 스타일이다. 여기에는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나 의원의 어머니는 대단한 에너지를 가진 분이다. 올해 70세.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것은 어떤 일이든 시작하면 미치도록 정성을 쏟는 성품이다. “어머니에 비하면 10분의 1도 못 쫓아가는 것 같다”는 나 의원은 아직도 어머니를 닮아가는 중이다. 정치를 하면서, 아니 여태 살아오면서 나 의원이 특정인을 인생의 모델로 정하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보통 정치인들은 역사적 위인 또는 현대사에 한 획을 그은 해외 유명 정치인 등을 거명하지만, 나 의원은 그렇지 않다. 단지 호평받는 인물의 필요한 장점만 뽑아 내공을 쌓는 데 만족한다. 가령 미국의 대표 여성 정치인인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의 카리스마와 자신감, 조선시대 정조의 소통력과 포용력, 황희 정승의 법치주의 등 다양한 면면을 체현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 중이다.

이 같은 노력의 시작점은 학창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적어도 여성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직업, 특히 사소한 권리라도 보호해줄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법대 진학을 꿈꾸면서부터다. 성숙한 여고생이었지만, 나 의원 역시 여느 학생과 다를 바 없이 학교 앞 문방구에서 파는 떡볶이와 어묵을 좋아하던 소녀였다. 사춘기도 겪었다.

“만날 1등만 한 것은 아니에요. 사춘기 때 성적이 조금 떨어지기도 했고요. 저는 겁이 많아 일탈은 없었고, 그저 상상만 했던….(웃음) 제가 딸만 넷인 집안의 첫째였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얌전히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나 의원이 잠시 후 “아! 하나 있다”며 고해성사하듯, 숨겨온 비밀을 한 가지 털어놨다.

“제 나름의 기준으로 봐서는 탈선한 것이 하나 있어요.(웃음) 그런데 정말 말해도 되나? 고3 때 보충수업 빠지고 같은 반 친구와 영화를 보러 갔던 거예요. 그 영화 제목이 <빙점>이었어요.”

그렇다. 1981년 4월18일 토요일 ‘국민학생 관람불가’ 등급으로 서울 명보극장에서 러닝타임 2시간30분짜리 초장편 영화 <빙점>을 개봉했다. 이 영화에는 나 의원이 기억하는 원미경을 비롯해 남궁원·김영애·이영하·한진희·정한용·선우용녀·박원숙 등 당대 스타들이 대거 출연해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나 의원은 학창시절 1등을 놓친 기억이 손에 꼽을 정도의 모범생이자 수재였다. 역시 목표대로 서울대 법대에 진학했고, 사법시험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놀랐단다.

“공부 잘하는 사람이 너무 많더라고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서 처음부터 잘한다기보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열심히 노력한 결과라는 사실을 알았어요. 비밀인데, 제가 사법시험에 많이 떨어지면서 깨달은 거예요.”(웃음)

나 의원은 대학시절 국제법학회라는 모임에 들어 활발하게 활동했고, 줄곧 법 공부에 매달려 1992년 제34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고시 동기 의원으로는 원희룡(46·한나라당)·이상민(52·자유선진당) 의원이 있다. 사법연수원 제24기로 수료한 나 의원의 첫 발령지는 부산지방법원 판사였다.

이어 인천지방법원과 서울행정법원 판사를 역임했다. 판사시절 나 의원은 판결 전 조정의 명수로 유명했다. 하루 10건 중 7~8건을 조정할 정도로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면서 타협점을 찾는 포용력이 뛰어났다. 대학 동창이자 고시 선배인 동갑내기 남편의 조력이 큰 도움이 됐다.

남편인 김재호(47·사시31회) 현 의정부지방법원고양지원 부장판사는 나 의원이 법조계를 떠나 정치인이 됐을 때도 크게 내색하지 않았던 ‘신중파’다. 나 의원은 그런 김재호 판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제가 지금까지 어떤 인물도 인생의 모델로 삼지 않은 이유는 100% 좋고, 100% 싫은 것이 없었기 때문일 수 있어요. 그래서 제가 줄을 안 서나 봐요.(웃음) 정치하면서 호불호(好不好)가 분명한 태도도 필요한데…. 남편 좋아했던 것 말고는 100% 좋아한 것이 없는 것 같아요.”

글 오흥택 월간중앙 기자 [htoh@joongang.co.kr]
사진 이찬원 월간중앙 사진팀 차장 [l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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