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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포커스] 샹젤리제에 태극기 꽂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전통적으로 프랑스의 국빈(國賓)에 대한 의전예우는 손님의 혼을 빼놓기로 유명하다. 국빈방문을 하는 외국의 국가원수는 보통 파리 남쪽 오를리공항에 도착한다.

공항 환영행사가 끝나면 경찰 사이드카의 요란한 호위를 받으며 나폴레옹의 유해가 묻혀있는 파리 시내 앵발리드 안뜰로 이동, 의장대를 사열하게 된다.

이어 1백여마리의 마필로 구성된 공화국 근위 기마대를 앞세우고 앵발리드 광장과 알렉상드르 3세 다리를 건너 프랑스 대통령 관저인 엘리제궁 바로 옆 영빈관으로 향하게 된다. 국빈행차는 그 자체로 훌륭한 구경거리다.

자크 시라크 대통령 집권 이후 기마대 행렬이 사이드카로 대체되는 등 의전절차가 다소 간소화됐다지만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니다.

지난해 프랑스를 방문했던 장쩌민(江澤民)중국 국가주석은 기마대 행렬을 앞세웠고 프랑스 중부 코레주에 있는 시라크 대통령의 사저(私邸)로 초대돼 1박2일을 함께 보냈다. 인권시비 속에 江주석에 대한 칙사대접은 프랑스 사회의 논란거리가 되기도 했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 가운데 3명이 프랑스를 다녀갔다. 다음달초 유럽순방에 나서는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프랑스를 찾는 네번째 한국 대통령이 된다.

유럽순방이 임기 중.후반기의 필수코스처럼 된 것은 전두환(全斗煥.1986년)대통령 때부터다. 이후 노태우(盧泰愚.89년)대통령과 김영삼(金泳三.95년)대통령으로 이어지면서 12대부터 역대 대통령은 으레 한번쯤 유럽을 순방하는 것으로 돼 있다.

한국 대통령의 유럽순방 때마다 빠지지 않는 나라가 프랑스라는 점은 흥미롭다. 그러나 한번도 한국 대통령의 방문행사가 프랑스 언론에 제대로 취급된 일이 없다는 건 유념할 대목이다.

프랑스 언론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한국 대통령의 방문을 철저히 무시해 왔다. 유럽순방 때마다 대단한 정상외교라도 펼치는 것처럼 법석을 떨어온 국내 언론과는 너무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프랑스 언론의 '냉대' 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기사거리가 될 만한 이슈나 화제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꿔 말해 그들의 눈에는 '의례적 환대' 나 즐기러 온 것처럼 비춰진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르 몽드를 비롯한 프랑스의 여러 언론매체들이 서울에 기자를 보내 DJ 방불(訪佛)을 앞두고 특집기사를 준비 중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도 '아시아의 만델라' 로 이미지가 각인된 DJ 개인에 대한 높은 평가 때문이지 양국관계 전반을 보는 시각 자체가 달라졌기 때문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솔직히 DJ만큼은 전임자들과 좀 다를 것으로 기대했다. 남들 다 하는 유럽순방이라고 중대한 현안이나 화급한 이유 없이 막대한 예산을 써가며 때맞춰 유럽순방에 나서는 것은 우리의 자존과 관계되는 문제라 보았고 DJ만큼은 그런 점까지 세심하게 의식할 걸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꼭 필요할 때 하는 것이 정상의 순방외교지, 남발하면 '유람' 으로 전락하고 만다.

청와대는 DJ의 유럽순방 계획을 발표하면서 정치.경제적으로 유럽연합(EU)이 우리에게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역대 정권들도 유럽순방 때면 늘 그렇게 말해왔다. 하지만 그 때만 지나면 언제 그랬느냐는듯 한국외교의 변방으로 밀려나고마는 것이 대(對) EU 외교의 현주소다.

나는 지금도 89년 12월 2일 아침의 '감동' 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2박3일간의 프랑스 국빈방문을 마치고 떠나는 날 아침, 영빈관 조찬에 초대된 파리주재 한국특파원들을 향해 盧대통령은 "여러분, 언제 샹젤리제에 저렇게 태극기가 휘날린 적이 있었습니까" 라며 참을 수 없는 감동을 토로했다. 환대를 평가로 이해했다면 감동은 당연한 것이었다.

프랑스의 국빈에 대한 극진한 대접은 프랑스 외교의 전통과 권위로 치장된 독이 든 사과나 다름 없다. 盧대통령의 방불 이후 고속철도는 결국 프랑스 TGV로 넘어갔다.

TGV에 이어 프랑스가 한국에 노리고 있는 것은 라팔 전투기와 미사일이고 잠수함이다. 외교지평의 확대니 동반자적 협력관계의 구축이니 하는 거창한 구호를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대접받는데 목적이 있는 것처럼 비춰지는 '유람성' 순방외교는 이제 재고할 때가 됐다.

파리〓배명복 <파리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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