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 공익활동 시작도 못하고 좌초 위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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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일하기도 바쁜 마당에 무료 변론이라니…. " 서울 강남에 개업 중인 한 변호사(55)는 "공익활동을 하라는 취지는 좋지만 개업 변호사로서 매달 한번 봉사활동을 나가긴 현실적으로 어렵다" 고 말했다.

변호사들의 공익활동을 의무화한 개정 변호사법이 지난해말 국회를 통과해 오는 7월 시행을 앞두고 있다. 하지만 일선 변호사들이 강력 반발하고 있어 자칫 이 제도가 사문화될 위기에 놓였다.

개정 변호사법 제27조는 '변호사는 연간 일정시간 이상 공익활동에 종사해야 한다. 공익활동의 범위와 구체적인 시행방법은 대한변호사협회가 정한다' 고 규정하고 있다.

대한변협과 법무부는 지난해초 대전 법조비리 사건 등으로 변호사의 윤리가 여론의 도마 위에 오르자 공익활동을 통해 법조계 신뢰를 회복한다는 취지에서 내부 반발에도 변호사의 사회봉사를 법으로 정했다.

이에 따라 대한변협은 지난달초 미국변호사협회(ABA)의 규정을 참고, 매년 50시간 이상 공익활동에 참여토록 하고 불참시에는 시간당 1만원의 기부금을 받는다는 초안을 마련했다.

그러나 일선 변호사들의 반발 때문에 두차례 회의를 열고도 아무런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변호사들은 일률적으로 50시간의 공익활동을 강제토록 한 것은 현실을 무시한 탁상행정이라고 거부 반응을 보이고 있다.

서울 서초구 서초동에 사무실을 둔 한 변호사는 "한달에 4시간 이상 무료변론 등을 하라는 셈인데 바쁜 변호사들이 어떻게 꼬박꼬박 참여하겠느냐" 고 반문했다.

실제로 지난달 서울 지역에서 활동하는 변호사 중 ▶시민 법률상담▶중소기업 법률상담▶당직변호▶외국인 노동자 상담 등 무료 변론활동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변호사는 2백27명. 서울 등록 변호사 2천4백87명의 10%에도 못 미치는 실정이다.

서울지방변호사회는 지난해 퇴근길 직장인들을 위해 야간 무료법률상담실을 운영키로 하고 예산까지 확보했으나 자원자가 없어 포기했다.

로펌(법률회사) 소속 변호사들의 반발은 개업 변호사들보다 더 거세다. 로펌에 속한 C변호사(35)는 "무조건 봉사활동에 나서도록 하고 거부하면 제재한다는 것은 시대착오적 발상" 이라며 "무료변론 등 직접 봉사활동을 하는 방법말고 성금기부 등 다양한 방안을 도입해야 한다" 고 말했다.

변협은 변호사들의 반발을 의식, 당초 입장에서 한발 물러서 봉사시간을 50시간에서 30시간으로 줄이고 65세 이상 고령 변호사는 공익활동에서 제외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그러나 일부 개혁성향의 변호사들은 이같은 반발이 변호사의 사회적 책임과 의무를 간과한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또 다른 C변호사(47)는 "변호사들이 서민과 약자를 위해 일한다는 말은 윤리강령에나 나오는 이야기" 라며 "돈벌이가 되지 않는 일엔 관심없는 변호사들의 이중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 라고 꼬집었다.

김상우.채병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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