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보안법 충돌, 나라가 흔들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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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국가보안법 처리 문제에 접근하는 여야의 태도를 보면 우려를 금할 수 없다. 과연 이 나라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해서다. 열린우리당은 노무현 대통령의 보안법 폐지 발언 이후 강경 일변도다. 당론을 '폐지 후 보완'으로 정한 뒤 사실상 폐지에 가까운 대안을 마련하고 있다. 당내에서 개정 또는 신중한 처리를 주장하던 사람들의 목소리는 사라졌다. 한나라당은 한나라당대로 경색되는 분위기다. 박근혜 대표는 "모든 것을 걸겠다"면서 배수진을 치고 나섰다. 그러면서 부분 개정 수준에서의 현행법 골격 유지를 다짐하고 있다. 양측의 이념 차이와 감정의 골은 점점 벌어지고 있다. 정기국회에서의 충돌도 불가피해 보인다. 기세싸움을 넘어 이제는 국론분열 단계로 접어들었다.

상황을 보는 마음은 참으로 답답하다. 우리가 이럴 때인가,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는가 해서다. 그런 점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사태 악화의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당초 정치권의 분위기는 이렇게 날이 서진 않았다. 여야의 주장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얼마든 타협이 가능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노 대통령이 방송을 통해 보안법 폐지를 주장해 정국을 '죽기살기'식 대결국면으로 몰아갔다.

가뜩이나 경제가 어렵고 민생고로 인한 국민의 비명이 높아가는 상황이다.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의 잇따른 결정으로 소모적인 보안법 논란이 수그러드는 시점에서 대통령의 말 때문에 다시 온 나라가 들썩대고 있으니 개탄을 금할 수 없다. 사실 노 대통령 하기에 따라서는 보안법은 급한 일도 아니다. 이 법이 수십년간 악용됐더라도 현재 집행권은 노 대통령의 수중에 있다. 정치적 이용을 막으면서 상당기간 문제없이 운용할 수 있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대통령이 각을 세우고 대결의 구도로 몰아가고 있는지 그 의도에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지금 국민은 극도의 불안감에 싸여 있다. 이 나라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종잡을 수 없다. 노 대통령과 여권은 전직 총리 7명과 전 국회의장 5명을 포함한 각계 원로의 시국선언을 경청해야 한다. 물론 편 가르기식 분류로는 이들 원로가 여권의 '아군'은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이들 다수는 노 대통령도 지적한 '세계 11위의 경제'를 만들어 낸 공로자들이다. 또한 자신들의 경력에 무슨 자리나 명예를 보태겠다는 욕심을 가진 사람들도 아니다. 이런 분들이 입을 모아 "대한민국의 안전과 한반도의 평화가 위태로워지고 있다"고 걱정하는 것을 흘려들어서는 안 된다. 원로들이 수도이전.보안법 폐지.과거청산 등의 일방적 추진을 중단하고 경제와 안보를 챙기라고 주문한 것을 충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나라를 더 이상 혼란으로 몰아넣으면 안 된다. 이제라도 고집과 비타협적 자세를 버려야 한다. 무엇보다 가장 필요한 것은 실사구시다. 낡은 이념과 교조적 명분에 집착해선 안 된다. 특히 상대를 이 판에 끝장내겠다는 적대감을 버려야 한다. 당리당략적 이해를 떠나 대국을 봐야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여야가 머리를 맞대고 보안법의 조문 하나하나를 따져보는 것이다. 전문가를 포함시켜 진지하게 검토하고 대안을 마련하라. 서두르지 말고 차근차근 진행할 일이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접근은 의외로 문제를 쉽게 만들 것이다.

실질에 관심을 두면 법안의 명칭도 문제되지 않을 수 있다. 개정이든 대체입법이든 여야의 합의 도출은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본다. 노 대통령과 박 대표의 영수회담도 대화를 통한 해결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시국은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노 대통령의 과제는 이제 보안법이나 과거사가 아니다. 국론이 분열되고 국민이 정부를 믿지 못해 마침내 나라가 위태로워지면 백번 보안법을 없애고 역사를 바꾼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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