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추적] “대형 계약” 허위발표 → 가짜 주식 발행 → 돈 챙겨 ‘먹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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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2007년 10월 30일 정보기술(IT) 벤처업체인 노드시스템 대표 이모(39)씨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씨는 “노드시스템이 금장휴대전화(일명 ‘골드폰’)를 개발해 러시아와 1500만 대 수출계약을 했다”고 발표했다. 휴대전화 수출사상 단일 규모로는 최대인 15억 달러(약 1조5000억원)에 달하는 것이었다. 두 달 뒤 이씨는 다시 기자회견을 했다. “2조원대에 달하는 러시아 와이브로 사업에 기술 수출 독점 계약을 체결했다”고 발표했다. 벤처업계와 서울 여의도 증권가는 들썩였고, 투자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주당 500원이던 주가는 장외시장에서 2000원까지 뛰었다. 일부 언론에서는 이씨를 벤처 신화를 이끈 30대 경영인으로 소개했다. 이씨는 당시 한 방송에 출연해 “5년 내에 디지털 장비 업계에서 세계 3대 브랜드가 되는 것이 목표”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불과 8개월 뒤 이씨가 발표한 계획은 모두 거짓으로 드러났다. 계약 발표 후 실제 수출이 이루어지지 않자 투자자들도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일부 투자자들은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지난해 9월 초 경찰 수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 사건을 수사한 서울 영등포경찰서 지능팀의 박범호 경사는 “치밀하게 계획된 한 편의 거대한 사기극”이라고 했다. 이씨가 발표한 회사의 실적은 모두 거짓으로 조사됐다. 피해 규모도 컸다. 허위 주식 5억 주가 발행됐고, 투자금을 모두 날린 사람만 1만여 명에 피해액수는 200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경찰은 추산하고 있다. 이씨는 경찰에 체포돼 한 차례 조사를 받은 뒤 풀려나 곧바로 잠적했다. 이후 공범 5명만 체포돼 지난달 말 징역 3~7년형을 선고받았다. 사건이 터진 지 1년가량이 흘렀지만 전국의 수많은 피해자는 여전히 이씨의 뒤를 쫓고 있다.

서울의 한 신학대학과 모 사립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한 이씨가 노드시스템이라는 벤처 회사를 설립한 건 2000년 2월. 서울 성북구 하월곡동에 있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 벤처밸리에 지인 5명과 함께 회사를 차렸다. 디지털 방송 기기를 개발하는 이 회사는 2003년 중국에 디지털 셋톱박스를 수출한 실적이 있었지만 투자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업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건 2006년 휴대전화 분야로 사업을 확장한 뒤였다. 수조원에 이르는 러시아 수출 계약 등 벤처 업계 사상 초유의 계약 실적이 발표되고 주가가 폭등했다. 하지만 금융감독원 등의 감시 시스템은 작동하지 못했다. 그동안 이씨는 빼돌린 투자금으로 전국 각지에 건물과 땅을 사들인 것으로 조사됐다.

이 사기극에는 휴대전화 부품회사를 경영하는 이씨의 아버지와 친인척, 주식 중개업자 등이 동원됐다. 피해자는 의사·변호사·법무사 등 전문직에 있는 사람들부터 회사원·자영업자·주부 등 다양하다. 10억원 이상을 날린 사람도 수두룩하다. 신용불량자로 전락해 이혼하거나 친인척들의 돈까지 끌어들였다 날리는 바람에 인간관계가 파탄 난 사람도 꽤 많다. 비상장 주식 중개 업체인 H투자금융도 큰 피해를 봤다. 이씨 측과 공모한 H사의 직원들이 회사 이름을 이용해 투자자를 모았기 때문이다.

현재 피해자들은 ‘노드시스템 피해주주연합회’를 만들어 이씨를 추적하고 있다. 1억원을 투자했다 날린 조용길(45)씨가 모임의 대표다. 조씨를 비롯한 운영진 20여 명은 수시로 모임을 열고 이씨의 행적과 빼돌린 투자금이 어디에 쓰였는지를 조사하고 있다. 조씨 등 피해자들은 “투자금 중 일부가 정치권에 들어간 의혹이 있다”면서 “이씨가 수사 선상에 오르자 정치권 인사들이 그를 구명하려고 움직이고 있다는 얘기가 파다했다”고 주장했다.

고성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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