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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기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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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영국 도시 리버풀은 비틀스를 팔아먹고 산다. 도시의 관문마저 ‘존 레넌 국제공항’일 정도다. 비틀스의 네 멤버가 나고 자란 점 때문에 연중 관광객이 모여든다. 이들을 위한 ‘성지 순례’ 코스에 꼭 끼는 게 페니 레인(Penny Lane)이란 거리다. ‘페니 레인은 내 귓가에, 내 눈 안에 있네…’ 비틀스 멤버들의 아련한 추억을 담은 동명의 히트곡 덕분이다.

사실 그 페니 레인은 18세기에 악명 높던 노예상 제임스 페니에게서 이름을 따왔다. 당시 리버풀은 유럽에서 삼각무역이 가장 활발한 항구였다. 리버풀을 떠난 배들이 서아프리카 해안에 가서 싣고 간 물건과 원주민들을 맞바꿨고, 다시 대서양 너머 신대륙으로 가 원주민들을 판 뒤 설탕·담배·커피 등을 챙겨온 거다. 이렇게 노예로 팔려간 이가 1000만 명 안팎에 이른다는 추산이다. 불과 30~40㎝ 너비에 한 명씩 수백 명을 싣고 몇 달간 항해하다 보니 도중에 사망자도 수백만 명이나 나왔다고 한다.

부끄러운 과거를 리버풀은 결코 잊지 않았다. 1999년 시 의회가 나서 “추악한 거래를 깊이 후회한다”며 공식 사과했다. 2007년엔 조상들의 치부를 낱낱이 공개한 ‘국제노예박물관’을 열었다. 이곳엔 노예선의 비인간적 상황을 직접 느껴보는 가상 체험 공간도 마련했다. 피해자의 고통을, 가해자로서의 책임을 후세까지 잊지 않게 하려는 세심한 노력이었다.

이웃 나라 일본 히로시마에는 ‘평화기념박물관’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군 만행에 대한 자료도 일부 있지만 주로 미국의 원폭 투하로 인한 참상을 보여주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일본 전역에서 수학여행차 학생들이 몰려드는 이곳도 피폭 당시 희생자들의 고통을 생생히 느낄 수 있게 첨단 체험 공간을 갖추고 있다.

얼마 전 즉위 20년을 맞은 아키히토(明仁) 일왕은 “과거의 역사를 잊고 있는 일본이 걱정스럽다”는 말을 했다. 그 말 속엔 가해자로서의 수치스러운 과거도 포함돼 있을 거라고 믿는다. 그렇다면 히로시마 박물관부터 달라져야 하는 게 아닐까. 원폭 피해만 강조할 게 아니라 원폭이 투하되기까지 일본이 저지른 잘못도 속속들이 알려야 한다는 얘기다. 일본 국민은 원폭 가해국인 미국 대통령이 히로시마를 찾길 염원해왔고 최근 오바마가 이에 부응할 뜻을 내비쳤다. 과연 그때 그에게 어떤 역사를 보여줄 것인가. 일본의 선택이 궁금하다.

신예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