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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인터뷰] 파리의 소믈리에 리지웨이 “김정일도 나한테 와인 강의 부탁했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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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경매를 앞두고 준비가 한창인 세계 최고 와인 레스토랑 투르 다르장의 400여년 세월의 흔적을 셰프 소믈리에 데이비드 리지웨이(David Ridgwayㆍ51) 와 함께 지하 와인창고에서 더듬어 봤다. 와인 병에 내려앉은 뽀얀 먼지만큼 켜켜이 쌓인 이야기들은 두 시간 가까이 이어져도 끝날 줄을 몰랐다. 스물 두살에 레스토랑에 발을 들여놓은 리지웨이는 내년이면 이 곳에서 꼭 삼십년째가 된다. 프랑스 와인 전문가들은 “리지웨이가 수줍음이 많은 성격이라 인터뷰에 잘 응하지 않는 편”이라고 귀띔했다. 만나보니 소탈한 성격은 아니었지만 수십년 와인과 사람 이야기가 이어지자 입꼬리가 연신 올라가며 흐뭇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데이비드 리지웨이가 기자를 안내한 지하 와인 저장고에서 아주 귀한 와인이라며 1945년산 로마네 콩티를 들어 보였다. [파리=전진배 특파원]

#영국인으로 프랑스에서 소믈리에로 산다는 것

-이름을 보니 프랑스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영국에서 왔나.

“런던 근교에서 태어났다. 영국에서 와인 학교를 졸업하고 와인을 제대로 배우고 싶어 스물한살에 파리로 무작정 건너왔다. 와인이 너무 좋았던데다 마침 프랑스 여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면서 앞 뒤 가리지 않고 왔다. ”

-프랑스에서 영국 소믈리에가 자리잡기 쉽지 않았을텐데 어떻게 최고 와인 식당의 셰프가 됐나.

“(웃으면서) 처음에는 앉아있을 시간도 없었다. 새벽부터 와인창고에 내려가 와인병의 먼지 닦고 레스토랑 바닥 청소하고 주방일도 했다. 몇 달 지나면서 선배 소믈리에들과 함께 식탁에 서게됐다. 굉장히 떨렸는데 무엇보다 프랑스말을 잘 못하는게 걱정이었다. 프랑스 최고급 식당인 투르 다르장에 오는 손님들이 외국인에게 와인을 추천받는다는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래서 아내에게서 부지런히 프랑스어를 배웠다. (그는 프랑스어가 유창했지만 30년이 지난 지금도 영국식 억양은 그대로였다) 그래도 영국 사람이라는건 최근까지도 영업상 비밀이었다. 프랑스와 영국 관계 잘 알지 않나. 요즘도 양 국간에 럭비 경기라도 열리는 날에는 런던과 파리 전체에 긴장이 흐른다. 지면 난리나는 거다. 그런 라이벌 의식이 최근 몇년 전부터 ‘유럽은 하나’라는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조금씩 풀린 것 같다. 그래서 요즘은 영국 사람이라는걸 굳이 감추지 않는다. 어차피 많이들 알기도 하고 갷.영국 사람이기 때문에 여러가지 어려운 점이 많았지만 와인에서는 절대로 밀리지 않겠다 마음 먹고 프랑스 소믈리에보다 두 배로 노력했다. 그게 오히려 내게 힘을 쌓는 계기가 된게 아닌가 싶다.”

-이제 프랑스 사회에서 명사 대접을 받는데 요즘도 직접 손님을 맞는가.

“우리 집에는 정규 소믈리에만 12명이 있다. 와인 만큼은 어느 식당에도 뒤지지 않겠다는 자존심이 있고 실제로 그렇다고 본다. 그런 만큼 내가 해야할 일이 아직도 많다. 물론 나를 보고 찾아오는 사람도 적지 않다. 아직도 하루에 10개 테이블 정도는 내가 직접 챙긴다.”

# 김정일의 와인 강의 요청

라 투르 다르장은 지금까지 각국 정상과 국왕도 수십 명 찾아와 와인과 음식을 즐긴 곳이다. 레스토랑 벽에는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이 식사하러 와서 찍은 사진이 붙어 있다.

-30년간 최고 와인 레스토랑에서 소믈리에로 일했으니 기억에 남는 일이 많을 것 같다.

“한 두가지 꼽기는 어려운데. 한국 기자는 처음 만나는 것이니 북한 얘기는 어떨까 싶다. 10년 전에 한 동양 손님이 나를 찾아서 가봤다. 그랬더니 매우 은밀하게 북한에 좀 가야겠다고 하더라. 무슨 말인가 했더니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내게 와인을 배우고 싶다는 것이었다. 와인에 대해 말하고 싶으면 우리 식당에 오면 될 일이지 했더니 그 사람들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아주 구체적인 계획을 알려줬다. 나는 레스토랑 책임자이기 때문에 갈 수 없다고 하고 대신 내 밑에 있던 소믈리에와 주방장을 보냈다.”

-제자 소믈리에가 북한 여행에 대해 어떻게 말하던가.

“처음부터 좀 이상야릇한 여행이었다. 북한측에서 안내하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상당히 보안을 강조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평양행 직항편이 없었기 때문에 북한 정부쪽 사람들이 안내해준대로 베이징으로 날아갔다. 베이징에서 어느 곳으로 이동한 뒤 그때부터 기차를 탔다. 그런데 기차의 차창이 모두 막혀있었다고 한다. 겁이 나기도 했는데 깜깜한 터널속 같은 여행을 한참동안 한 뒤 평양에 도착했다. 그리고는 다음날부터 일주일 내내 김정일과 와인 세미나를 했다.”

-와인 세미나라는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나.

“그쪽에서 처음부터 우리에게 요구했던 것이다. 인텐시브 코스 와인 강의인 셈이다. 이를 위해 그 때 우리 소믈리에는 와인을 이것 저것 많이 챙겨 갔다. 그리고 와인에 맞는 요리를 위해 식자재도 가져 갔다. 일주일동안 거의 매 끼니마다 프랑스 코스 요리와 함께 와인과의 궁합을 설명했다고 한다.”

-김 위원장의 와인 기호는 어떠했나.

“놀라운 것은 생각했던 것보다 김정일 위원장이 이미 상당히 많은 종류의 와인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코냑부터 여러 지방의 와인이 다양하게 구비돼 있었다고 한다. 김 위원장은 와인에 대한 식견이 꽤 높았고 보르도와 부르고뉴 와인을 두루 즐겼는데 샤토 라투르 등 최고급 와인들을 좋아했던 것으로 들었다. 김 위원장은 우리 소믈리에의 와인 강의에 상당히 만족했고 그래서 대접도 좋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 뒤로는 그런 부탁은 더 없었다. 우리 집에 왔던 북한 손님도 그 후론 못 본 것 같다.”

#리지웨이가 생각하는 와인은

-프랑스 소믈리에들은 대개 미국 와인 평론가 로버트 파커의 와인 점수에 부정적이다. 당신은 영국인인데 어떻게 생각하나.

“(흥분된 목소리로) 30년 넘게 와인하고만 살았는데 세상에 어떤 와인은 97점이고 어떤 와인은 94점이고 그런게 어떻게 가능한지 모르겠다. 와인은 그냥 음료수가 아니다. 와인은 어떤 음식과 함께 하느냐, 어떤 잔에 어떻게 내놓느냐, 누구와 함께 드느냐, 낮이냐 밤이냐 등에 따라 정말 다르게 느껴진다. 물론 어느 정도의 품질 등급이라는 것은 있겠지만 학교에서 학점 주듯 점수를 매기는 것은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그가 점수를 잘 주면 그 와인은 하루아침에 종교가 된다. 와인은 숭배하는 대상이 아니다. 그저 즐기면 될 뿐이다.”

-30년동안 손님들의 와인 취향은 어떻게 달라졌나.

“우리 음식점은 단골들이 많이 찾기 때문에 다른 곳에 비해 변화가 적은 곳이다. 그런데 요즘에는 중동이나 아시아에서도 손님들이 많다. 국가별로 와인 취향을 나누기는 어렵지만 중동이나 아시아쪽 손님들은 대체로 가격을 많이 따지는 편이다. ”

-그래도 일반적으로는 비싼 와인이 품질을 보증하는 것 아닌가.

“물론 가격이 비싼 와인에 훌륭한 맛을 가진 것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가격 역시 앞서 말한 로버트 파커의 와인 점수 매기기와 비슷한게 아닐까 싶다. 여러가지 요인들로 볼 때 점수가 높은 것, 가격이 비싼 것이 좋은 술일 확률이 더 높기는 하지만 와인은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얘기다. 나는 와인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는 우선 싼 것부터 마시라고 권한다. 그렇게 해서 차차 혀를 통해 가격이 아니라 맛과 멋을 배워가야하는 것이다. 우리 레스토랑에 30유로(약5만2000원)대의 저렴하면서 좋은 와인을 가져다 놓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파리에서는 일본 음식과 한국 음식이 최근 인기를 얻고 있다. 이들 음식에는 어떤 와인이 좋은가.

“매운 음식을 즐기지 않는 편이라 아직 한식은 못 먹어봤는데 일식은 여러번 접해봤다. 회 종류는 일반적으로 화이트 와인이 잘 어울리는데 특히 도미회는 리슬링 품종이 그만이더라. 레드중에서도 피노누아나 가메 같은 것은 좋았던 것 같다. 광어회는 샤블리가 안성맞춤이다.”

#와인과 사람들

-투르 다르장을 찾은 명사 가운데 인상에 남는 사람을 꼽는다면.

“워낙 많기 때문에 누구 먼저 말해야할지 모르겠다. 그래도 우디 알렌이 좋겠다. 알렌은 우리 집에 여러번 왔는데 와인을 참 제대로 알고 즐긴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누가 와인에 대해 많이 아느냐 모르느냐를 따지지 않는다. 그는 주로 부르고뉴 와인을 즐기는 편이었는데 가슴 깊이 음미하면서 나름대로 객관적인 와인의 특징도 잘 집어냈다. 한마디로 와인에 관한한 탁월한 사람이었다. 폴 매카트니도 단골인데 그는 샴페인 마니아다. 처음부터 끝까지 샴페인만 마신 적도 여러번 있다. 유머러스하고 성격이 아주 좋아서 그와의 와인 대화는 늘 즐거웠다. 숀 코네리는 술이 참 센 사람이었다. 폭음하는 편은 아닌데 천천히 이 술 저 술 음미하면서 많이 마시는 편이었다. 제임스 본드라서 그런지 잘 취하지도 않더라.(웃음)”

-정치인 중에는 누가 단골인가.

“빌 클린턴 대통령은 재임 시절 우리집에 오고싶다고 한 적이 있다. 그래서 준비도 했는데 경호 문제가 너무 복잡해 결국 포기했다. 그게 아쉬웠던지 클린턴은 대통령 퇴임후 얼마 지나지않아 두 번 우리집을 찾았다. 자크 시라크 전 대통령은 파리 시장 시절부터 여러번 왔다. 술이 아주 센 사람인데 처음에는 와인을 그렇게 많이 마시다가 나중에는 주종을 맥주로 바꿨다. 도수가 높은 와인을 너무 많이 마시다보니 건강상에 문제가 생겨 도수가 낮은 맥주를 택한 것이다. 도수를 낮추고 난 뒤 맥주는 여전히 많이 마시더라.”

-정치인 중에 우디 알렌처럼 와인을 제대로 즐겼던 사람은 누구인가.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은 (정부의) 집이 우리 레스토랑에서 멀지 않아 산책삼아 종종 왔다. 그는 와인을 마음으로 느끼고 즐길 줄 아는 멋쟁이였다. 보르도와 마콩 지방의 와인을 즐겼는데 나름 와인에 대한 철학이 있었고 나와 그런 이야기 나누는 걸 좋아했다. 나 역시 그런 그의 이야기들이 끌렸다. 반면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은 취임 전에 몇번 우리집에 왔는데 와인을 입에도 대지 않았다. 체질적으로 문제가 있어서라고 하는데갷. 프랑스의 정치인이 와인을 못한다는 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정말 유감스럽고 안타까운 일이다.”

-두주불사형으로 기억에 남는 손님은 누구인가.

“그건 단연 보리스 옐친 전 러시아 대통령이다. 옐친의 술과 관련된 에피소드는 이미 잘 알려져있지만 우리집에서도 재미있는 손님이었다. 그는 혼자서 두 병 이상은 마셨다. 그리고 더 시키려고 하면 그의 아내가 옆에서 쿡쿡 찔렀는데 ‘괜찮아’하면서 계속 주문을 더 했다. 그는 부르고뉴 지방의 샹베르탱을 좋아했다. 나폴레옹이 좋아했던 것으로 유명한 술 아닌가. 샹베르탱을 좋아한 이유도 바로 나폴레옹이었다. 그는 술에 취해 샹베르탱을 주문하면서 ‘나는 나폴레옹이다’하면서 껄껄 웃었다. 반면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우리집에 와서도 보드카만 마셨다. 그도 술을 좀 하는 편이어서 항상 너댓잔씩은 마셨는데 와인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다.”

#투르 다르장과 와인

-투르 다르장은 2차 대전 때 레지스탕스를 지원했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테라이 사장이 항독파였다. 독일군이 파리에 주둔했을 당시 친독파들이 득세할 때라 겉으로는 그런 내색을 안해 독일군 장교들이 자주 왔다고 한다. 히틀러는 한 번도 온 적이 없는데 그 밑의 고급간부들은 자주 왔었던가 보다. 프랑스 와인에 굶주렸던 그들은 무조건 최고급 와인을 내놓으라고 했다. 그러나 와인에 대한 지식은 거의 없어서 가장 싼 와인을 줘도 좋다면서 마셨다고 한다. 당시에 최고급 와인들은 와인 창고 한 구석에 별도의 방을 만들어 따로 보관하면서 비밀문을 만들어뒀다. 이따금 창고 구경을 하자는 장교들이 있어서였다. 그 문이 아직도 남아있다. 또 소믈리에나 웨이터들이 독일군 장교들이 나누는 작전 관련 대화 등을 엿들었다가 레지스탕스에 비밀 쪽지를 건네기도 했다는 얘기도 유명하다.”

-투르 다르장은 미슐랭 가이드에서 최고인 쓰리스타에서 한개로 떨어졌다. 여전히 최고의 퀄리티를 유지하는데 강등된 이유는 뭔가.

“미슐랭 가이드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은 변화다. 새로운 메뉴를 얼마나 다양하게 개발하느냐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대표 메뉴인 오리 요리는 수백년째 그대로 나온다. 미슐랭이 이런 이유로 점수를 낮게 주는 걸 알지만 우리는 세계 곳곳에서 우리집의 오리를 먹기위해 찾아오는 단골 손님을 외면할 수 없는 일이다. 실내 분위기나 좌석 배치 등도 그런 이유로 요즘 뜨는 식당들과 달리 옛 모습 그대로다. 그러나 우리도 부분적으로 신메뉴를 개발하고 재료를 바꾸고 한다. 그럴 때마다 요리사와 소믈리에가 오랫동안 회의를 거쳐 와인 셀렉션을 완전히 새롭게 바꾸기도 한다.”

-다음달 열리는 와인 경매가 큰 관심거리인데.

“세계 어느 곳을 봐도 우리집 만큼 와인이 양으로나 질적으로 훌륭한 곳은 없다.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400년 넘은 최고의 보물 창고가 열리니 역사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45만병 가운데 엄선해서 1만8000병을 내놓는데 1788년산 클로 드 그리피에 코냑과 1945년산 로마네 콩티 등이 과연 얼마에 낙찰될지 흥분된다. 나도 전혀 짐작을 못하겠다. 클로 드 그리피에 1788년산은 20년전에 한 손님이 주문한 뒤 아직 한 번도 세상 구경을 못 했다.”

파리=전진배 특파원allonsy@joongang.co.kr

◆투르 다르장 =1582년 앙리 3세가 왕실 접대용으로 문을 열었다. 당시에 돌로 건물 외벽을 치장했는데 센 강 너머로 해가 떠오르면서 돌에 반사되면 은빛으로 빛난다고 해서 투르 다르장(은빛 타워)이라고 이름 붙였다. 오리를 잡아 프레스 기계에 넣어 피를 짜내 익히는 특이한 오리 요리가 이 집의 명물이다.

1867년 차르 알렉산드르 2세와 프러시아의 빌헬름 1세를 비롯해 미국의 존 F 케네디 , 리처드 닉슨, 빌 클린턴 대통령과 히로히토,아키히토 일왕 등 수십명의 각 국 정상과 국왕이 이 곳에서 와인과 음식을 즐겼다. 45만병을 보관하고 있는 복층 구조의 와인창고는 1250㎡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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