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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인터뷰] 안대희 대법관 “판사 이념에 좌우되는 재판은 정의 아닌 불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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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안대희 대법관은 13일 서울 서초동의 대법원 청사 8층 사무실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판사는 법과 선례에 충실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법전에 손을 얹었다. [최승식 기자]

‘정의의 여신상’의 저울(공정성)이 판사를 의미한다면 칼(엄정한 처벌)은 검사를 상징한다. 안대희(54) 대법관. 2003년 대선자금 수사를 지휘했던 그는 2006년 대법관에 임명됐다. 칼에서 저울로 옮겨간 것이다. 그의 이름을 떠올린 것은 올해 검찰과 법원이 큰 홍역을 치르고 있기 때문이었다. 검찰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로 수뇌부가 물갈이되는 시련을 겪었다. 법원은 이념의 몸살에 시달려야 했다. 그의 눈에 비친 검찰과 법원은 어떤 모습일까. 대법관 취임 후 언론과의 인터뷰를 피해왔던 안 대법관은 본지의 인터뷰 요청에 응했다. 그는 “법원이 요새 어려운 입장에 있는 면도 있고, 할 얘기를 하는 것도 기피할 만한 일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그와의 만남은 한 번은 길게(10일), 한 번은 짧게(13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 청사 8층 그의 사무실에서 이뤄졌다. 그의 말투는 신중했지만 내용은 자로 줄을 긋듯 직선에 가까웠다.

글=권석천·박유미 기자
사진=최승식 기자

“판사, 유죄 → 무죄 바꿀 땐 형 대신 받을 각오해야”
검사에서 대법관으로

-대법관이 된 지 3년4개월이 됐는데 재판 서류를 넘길 때 판사들이 쓰는 골무를 이용하십니까.

“아닙니다. 익숙하지 않아서요. (엄지손가락을 들어보이며) 대신에 손가락이 많이 닳았습니다.”

-검사 출신이란 점에서 아무래도 검찰 쪽에 치우치지 않겠느냐는 시각도 있는데요.

“(웃으며) 법원과 검찰 모두 저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어요. 검사는 자신이 수사한 사건을 무조건 유죄로 보는 ‘선입관의 오류’를 경계해야 하고요. 판사는 법정에서 한 진술은 항상 옳고 수사기관에서 한 것은 틀렸다는 ‘인식의 오류’를 조심해야 하지요. 유죄가 선고된 구속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한 판결이 제가 제일 많을 겁니다. 유·무죄 판단은 정말 신중해야 하지요. 유죄를 무죄로 할 때는 (판사가) 그 형을 대신 받을 각오까지 해야 해요.”

2003년 12월 대선자금 수사 당시 안대희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의 인터넷 팬카페 회원들이 대검 청사를 방문해 수사를 성원하는 뜻에서 도시락을 전달하고 있다. [중앙포토]

-안 대법관의 판결 성향을 보면 보수 쪽에 가깝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보수 성향이란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다만 전체를 생각하는 공익적 경향이 판결에 반영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법관이 보수냐, 진보냐는 정치적 성향이 아니라 법률과 선례에 얼마나 엄격하느냐에 따라 분류해야 합니다.”

-김용담 전 대법관이 지난 9월 퇴임하면서 판사들의 편가르기를 우려했는데요. 진보 성향 판사들의 모임인 ‘우리법연구회’도 논란이 되고 있고요.

“이 자리에서 특정 단체를 거론하는 것은 부적절한 것 같습니다. 물론 판사도 개인적으로는 다양한 의견을 가질 수 있어요. 그러나 그런 소신이 법률과 합당한 선례를 넘어서 나타날 때는 그것은 자의적이지 않나, 특히 판사 개인의 정치적·이념적 성향에 의해 재판이 좌우될 때는 정의가 아니라 ‘공적 불의’에 해당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현재 우리 판사들 중에 그런 경우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만약 그런 판사가 있다고 해도 3심제에 의해 걸러질 수 있습니다.”

-헌법에 규정된 ‘법관의 양심’을 개인의 소신으로 여기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법관의 양심은 ‘양심의 자유’라고 할 때의 양심과는 다른 것입니다. 사심(私心)이나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고 법과 원칙에 따른다는 의지를 가리키는 것으로 봐야지요.”

-법원에 대한 국민 신뢰를 높이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국민이 납득할 만한 재판을 해야 하지요. 대법관을 하며 느낀 것이 있다면 정말 법률지식의 함량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판례를 모르고 법을 모르는 판사에게 재판을 받는 사람은 오판 받을 수밖에 없고, 감성적인 재판을 받을 수밖에 없어요. 또 재판에서도, 사생활에서도 오만하지 아니하고 진지한 자세, 겸손한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전관예우나 도를 넘은 이념적 성향도 오만의 하나인 것이죠.”

-대법원에 올라오는 1, 2심 판결을 보면 감성적이거나 오만한 판결이 보입니까.

“반드시 그렇다고 지적할 만한 것은 아닙니다만 어떤 룰을 벗어난 판결이 있을 수 있죠. 그런 것들이 대법원에서 많이 파기되니까….”

-대법관 생활이 어떻습니까.

“외로워졌습니다. 검사 때보다 행동에 더 신경이 쓰입니다. ‘법조인의 삶은 한 건의 사건에 달렸다’는 각오로 재판 한 건 한 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고요. 대법원의 재판연구관이나 가까운 후배 검사들과 가끔 저녁을 먹고는 합니다.”

-재산이 대법관 중 가장 적은 것(7억6000여만원)으로 알고 있습니다.

“강북의 아파트에서 20년째 살고 있습니다. 재테크에 관심이나 재능이 없다보니…별로 자랑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웃음)”

-자주 부르는 ‘18번’은 무엇인지요.

“싸이의 랩 ‘낙원’입니다. 제가 노래를 잘 못 불러서요.”

“노무현 전 대통령 연수원 시절 땐 정치할지 몰랐다”
대선자금 수사, 노무현, 검찰

-2003년 대선자금 수사 당시 각오는 .

“사회·정치·경제계 지도층 전반과 관련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진실 규명과 함께 공정성 유지를 가장 큰 원칙으로 삼았지요. 미흡한 점도 지적되긴 했습니다만, 최선을 다한 수사였고 지금도 그렇게 거리낌은 없습니다.”

- 그때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무엇이었는지요.

“사회적으로 한 다리만 건너면 알 만한 사람들에 대한 수사였습니다. 그런 걸 극복하는 문제라든지, 여야 모두의 공격 속에서 검찰의 신뢰를 지키는 문제가 힘들었습니다. 당시 10개월 이상을 야근한 것 같습니다.”

-정치권의 압력이 심하지 않았습니까.

“시간이 지나서 기억이 잘 안 납니다. (웃음)”

-송광수 당시 검찰총장이 2007년 대학 특강에서 ‘중수부 폐지 압력이 있었다’고 밝혔는데요.

“그런 분위기가 있었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당시 저도 (폐지는) 안 된다고 얘기한 적이 있죠.”

-몇 번의 고비가 있었습니까.

“크게 두 번의 고비가 있었습니다. SK 수사에서 전체 대선자금 수사로 확대할 때 제대로 증거가 안 잡혀서 한 달 정도 고생했습니다. 또 한나라당만 수사한다는 시각 속에서 당시 여당(민주당)에 대한 심도 있는 수사를 하다 보니, 그 과정에서 갈등이 많았습니다. 위험한 수사였죠. 언제 날아갈지 모르는….”

-겉으론 부드러워 보이는데 그런 수사를 계속할 수 있는 강단은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사법연수원 시절 별명이 ‘수줍은 사무라이’였습니다. 내성적인 성격인데도 원칙을 고집한다고 해서요. 대범해서 원칙을 지킨 게 아니라, 소심해서 다른 길로 벗어나는 것을 스스로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사법시험(17회)·사법연수원(7기) 동기지요. 연수원 시절 노 전 대통령은 어땠습니까.

“저보다 여덟 살 많으셨어요. 솔직히 그때는 정치하실 줄 몰랐고, 또 대통령 되실지도 잘 몰랐습니다.”

-역시 연수원 동기였던 정상명 전 총장이 검찰총장에 임명됐을 때 섭섭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모자라서 그랬을 수도 있고, 혹은 대법관이 되기 위해 그랬을 수도 있다고 봐요. 그런 과정에 대해 불만이 없습니다. 되고 싶어서 하는 자리보다 운명이 시킨 자리에서 자기 역할을 잘하는 데서 그 사람의 진정한 가치가 나타난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노 전 대통령이 지난 5월 대검 중수부 수사를 받던 도중에 서거했을 당시 소회가 어땠습니까.

“(잠시 말을 멈춘 뒤) 수사하는 검사들도 다 잘 아는 사람들이고, 수사받는 사람도 아는 분이기 때문에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혐의가 있으면 수사해야 한다는 원칙 때문에 수사는 어쩔 수 없지 않나 생각했었습니다.”

-어쩔 수 없었다는 건….

“거꾸로 안 하면 안 하는 대로 안 되는 것 아닌가, 형평성 문제도 있으니까요. 한 분은 돌아가시고 수사팀은 그만두고, 안타까웠지요. 봉하마을에 문상을 갔었는데, 그때는 정말 할 말이 하나도 없더군요.”

-안상영 전 부산시장이 2004년 대검 중수부 지시로 부산지검에서 조사를 받던 중 자살했을 때 안 대법관께서 한동안 눈물을 흘렸다고 들었습니다(안 전 시장은 안 대법관의 일가 삼촌뻘이다).

“(씁쓸한 표정으로) 여우의 눈물인지도 모르죠. 다 잘아는 분들인데 안다고 해서 수사를 안 하기도 이상하고, 그런 저런 일들이 착잡함으로 남습니다. 중수부장 마치면 절에 가서 기도해야겠다는 말을 농 반, 진 반으로 하기도 했지요.”

-검사에게도 트라우마(정신적 외상)가 같은 게 있습니까.

“왜 없겠습니까. 없다면 인간적이지 않죠. 아무리 정당하고 올바른 일을 했다고 해도….”

-김준규 총장이 수사 패러다임 개선 작업을 하고 있는데요.

“검찰이 어려움 겪을 때마다 가슴이 아픕니다. 수사에 있어서도 절차적 정당성이 강조되고 있어요. 그런 점에서 김 총장의 시도가 적절하다고 봅니다. 다만 어떤 일이 있어도 수사 역량이 약화돼선 안 되지요. 꼭 검찰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은 과감히 다른 기관에 넘기고 검찰은 국민이 요구하는 거악, 부정부패 척결에 주력해야 합니다.”

-검찰에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검찰이 너무 젊어졌어요. 짧은 기간에 보직들이 바뀌면 조직이 안정되지 않아요. 급격한 인사는 조직력을 약화시키고 검찰 독립과 중립도 훼손할 수 있습니다. 인사를 위해 적절치 못한 수단이 동원될 수도 있고요. 검찰이 정치적 외압 같은 외부 영향을 받지 않고 원칙대로 해준다면 국민의 신뢰를 받을 수 있다고 봅니다.”

“상고심선 조두순 형 못 올려 … 네티즌 비판에 속상해”
조두순 사건과 양형

-8살짜리 여아를 성폭행해 영구 장애를 입힌 ‘조두순 사건’에 대해 국민들의 분노가 큽니다. 그 사건의 상고심 주심을 맡으셨지요.

“어려운 사건이었습니다. 피고인이 범행을 극력 부인했어요. 또 피해자가 굉장히 큰 신체 장애를 입고 정신적 고통도 심했습니다. 피고인이 처음엔 완강히 부인하다가 2심에서 범행 장소에 간 일이 있다고 시인했고, 그런 상황들을 종합해서 유죄 판결을 했습니다.”

-많은 국민은 조두순에게 선고된 징역 12년형이 너무 낮다고 보는데요.

“상고심에서 피고인에게 불리하게 형량을 바꿀 수 없다는 게 법 원칙이어서 형을 올릴 수 없었습니다. 어쩔 수가 없었지요. 일부 네티즌이 그런 사실을 모르고 저를 비판할 때는 속이 좀 상했습니다.”

- 만약 조두순 사건의 1심이나 2심 재판을 맡았다면 더 높은 형을 선고했을지 궁금합니다.

“그건 뭐라고 말하기 힘듭니다. 판사가 피고인의 형량을 결정할 땐 큰 고뇌를 하게 됩니다. 쉽게 비판할 문제는 아닙니다. 다만 그동안 검찰이나 법원 모두 유죄냐, 무죄냐를 가리는 데 치중해 양형에 상대적으로 소홀했던 게 아닌가 봅니다. 국민적 관심사가 된 만큼 일시적인 게 아니라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 아동 대상 성범죄에 대한 개선 방안을 마련하고 양형 기준을 새로 마련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의 목소리가 잘 반영되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같은 전치 3주의 피해를 입었다고 해도 가벼운 3주와 온몸에 피멍이 든 3주가 있습니다. 여러 가지 주관적 부분에 대한 고려가 많이 돼야 하는데 과중한 업무로 인해서 불충분할 수도 있겠다, 생각됩니다. 대법원 양형위원회의 양형 기준 개선에 많은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조금 다른 얘깁니다만, 검찰과 법원 사이에 구속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빚어지곤 하는데요.

“법원과 검찰 사이에 신뢰가 돈독하고 협력이 잘되고 있다, 그렇게 말하기 어렵습니다. 가장 염려되는 대목입니다. 검찰은 수사 필요성이 있고 법원은 인권을 강조하다 보니까 충돌 가능성이 있는 것이지요. 불필요하게 서로 자존심을 내세운다든가 하는, 감정적인 마찰은 부적절합니다.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존중해야죠.”

-하지만 현실은 서로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불구속 재판이 확대돼야 한다는 원칙에 공감합니다만, 구속 수사 후 석방할 수 있는 많은 절차가 있습니다. 수사기관의 수사를 보장해주면서 혹시 그 과정에서 인권이 침해됐는지, 형평성을 잃었는지 통제하는 자세가 필요하고요. 불구속 상태에서 집행유예 판결을 받으면 처벌을 받지 않은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합니다.”

안대희 대법관

1955년생. 경기고를 졸업한 뒤 서울대 법대 2학년에 재학 중이던 75년 17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바로 사법연수원에 들어가 그의 최종 학력은 ‘대학 중퇴’다. 80년 서울지검 검사로 임관했다. 이후 대검 중수1·3과장, 서울지검 특수1·2·3부장 등 ‘특수통’으로 성장했다. 저질 연탄 사건, 서울시 버스회사 비리, 바다모래 불법 채취 사건 등 굵직한 경제 사건을 수사했다. 김대중 정부 시절 검사장 인사에서 두 번 탈락했다가 노무현 정부 들어 대검 중수부장으로 컴백했다. 나라종금 로비 의혹 사건 재수사에 이어 SK 비자금 사건과 대선자금 수사를 지휘하면서 ‘국민검사’로 불렸다. 대법관으로서 그는 형사사건과 조세사건에 있어선 엄격하지만, 여성과 난민·무허가건물 입주자 등 사회적 약자 보호엔 적극적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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