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어색한 한전 모금운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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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세정 경제부 기자

한국전력이 지난 6일부터 이색 모금운동을 했다.

"3개월 이상 전기요금을 내지 못해 단전됐거나 단전이 예고된 저소득층을 지원하기 위한 기금을 만들자"는 것이다.

10월 31일까지 계속되는 이 운동에는 한전 직원 1만9000여명과 10개 관계사가 적극 나서고 있다. 한전을 찾는 국민도 참여하도록 240개 사업소에 모금함을 설치했고 '아름다운재단'의 홈페이지(www.beautifulfund.org)를 통한 인터넷 모금도 시작했다.

그러나 자산 규모가 56조원에 이르는 국내 최대의 공기업 한전이 모금운동으로 저소득층에 대한 단전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은 왠지 어색해 보인다. 더구나 한전은 전기료를 못 내는 저소득 가구에 단전조치를 내리는 당사자가 아닌가.

전기는 상수도와 함께 현대 생활에서 가장 기본적인 생존조건이다. 또 전기를 공급받지 못하는 빈곤 가구가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심각한 사회 문제다.

전기요금을 연체한 가구수는 2001년 말 54만가구에서 지난 5월 말에는 89만가구로 급증했다. 3개월 이상 연체해 단전된 가구는 올 들어 지난 6월까지 22만가구에 이른다. 이들 중 3000여가구는 지금도 전기 없이 하루하루를 어둠 속에서 보내고 있다.

지난 2월에는 4개월치 전기요금 9만원을 못 낸 장애인 부부가 강제 단전된 집에서 촛불을 켜고 잠자다 화재로 숨지는 참사가 있었다.

그러나 한전이 이런 딱한 사정에도 불구하고 저소득층에 무료로 전기를 대주지 못하는 데는 나름대로 고민이 있다.

한전 관계자는 "한전은 엄연히 전기라는 상품을 파는 상장기업"이라며 "무작정 전기요금을 감면하는 것은 다른 고객에게 요금을 떠넘기는 셈이고, 결국 돈 있는 사람까지 요금 납부를 꺼리는 도덕적 해이를 막기 어렵다"고 말한다. 수익자 부담의 시장경제 원칙에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요금 감면이나 모금운동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못 되는 만큼 빈곤층에 대한 사회안전망을 확보한다는 차원에서 정부가 직접 나서야 한다"고 말한다.

정부가 별도 재원을 마련해 국민의 기본생활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얘기다.

장세정 경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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