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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부영의 통찰력과 그 이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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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열린우리당 이부영 의장은 지난 대선 때 한나라당 진영에 있었다. 선거대책위원회 부위원장이던 그는 선거를 9일 앞둔 2002년 12월 7일 MBC-TV에 출연, 이회창 후보를 찍어 달라는 찬조연설을 했다.

"안전하게 앞으로 나아갈 일등 모범 운전자를 선택하시겠습니까? 어디로 굴러 떨어질지 모르는 난폭한 초보 운전자에게 나라의 핸들을 맡기시겠습니까?" (인터넷 이부영 홈페이지 참조)

노무현 후보를 초보 운전자에 비유하며 이 후보 지지를 호소했다. 이부영 의장은 더 나아가 "글쎄 대통령감으로는 어떨까요?" 라고 운을 뗀 뒤 '인기 위주의 튀는 행동' '개혁이고 쇄신이고 모든 신념을 접어두고 최고 권력자의 환심을 사는 데 온 신경을 곤두세우는 인물'등 노 후보를 신랄하게 깎아내렸다.

당시의 발언을 반추해보면 2년도 안 돼 노무현 정권의 핵심 인물로 부상한 이의장에 대해 어리둥절해질 수 있다. 어찌 저렇게 변신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의 정치 여정과 성향 등을 감안하면 현재의 위치가 오히려 더 어울릴 수도 있다. 끝까지 의리를 지키고 자기 말에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았겠지만, 우리네 정치판 논리는 그런 덕목에 높은 점수를 주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이제 와서 이 의장의 당시 연설에 새삼 주목하는 이유는 '변신'을 탓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노무현 후보에 대한 평가와 노무현 정부에 대한 예측이 딱 들어맞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이 의장은 "민주당과 노무현 후보는 자꾸 과거로 돌아가려는 것 같아 안타깝다"며 "다른 진영을 청산과 배제의 대상으로 보는 시각과 관성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그의 안타까움은 오늘 우리 사회의 안타까움이 되고 있다. 최대 화두로 떠오른 각종 과거사 청산 논란부터가 그렇다. "차 마시고 토론해봐야 소용없는" 강남사람을 비롯해 조중동.재벌.사법부.서울대 등 기득권 세력에 대한 '청산'과 '배제'작업도 계속되고 있다.

"대통령 후보와 그 주변이 독선적 사고를 가지고 있다면, 집권 이후 얼마나 커다란 혼란이 초래되겠습니까?" "과거의 틀에 따라 편을 가르고, 극단적인 대립과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바로 낡은 정치입니다."

경제위기를 거론하는 '개혁저지 세력'에서부터, 힘 센 사람이 맘대로 하자는 '보수', 간첩이 민주화인사로 둔갑했다고 비판하는 '수구 꼴통'에 이르기까지. 이 의장은 이미 그때 그러한 편가르기를 예견하고 그에 따른 갈등.대립.혼란을 경고하고 있다. 놀라운 진단이다.

이부영. 1980년대 그는 장기표.김근태 등과 함께 재야 운동권의 대명사였다. 74년 동아일보 해직 이후 91년 민주당에 입당하기까지 다섯 차례나 감옥을 드나들며 민주화 투쟁에 몸을 던졌다. 당시 386 운동권 학생들은 그의 신념에 찬 행동에 박수를 보냈었다. 바로 그 점에서 그는 386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여당의 대표로 손색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제 그는 중대한 시험대에 올라 있다. 자신의 발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민주화 투쟁에서 보여준 신념이 지금도 유효하다면 자기가 예견한 '혼란'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상황에 대해 설명하고, 그 타개책을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시류에 따라 왔다갔다하는 3류 정치인과 다를 바 없다. 특히 그는 자신이 우려했던 그 '초보 운전자'와 나란히 운전석에 앉아 함께 핸들을 잡았다. 안전운행으로 이끌기 위해 몸을 던질 것인가, '난폭 운전'에 그냥 편승할 것인가. 모두가 주목하고 있다.

허남진 논설위원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