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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엄 담론] 4. 윤구병 변산학교 교장의 '새 교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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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교육이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 가 아니었던 시대는 없었다.

그 중요성 때문에 교육이 줄기차게 개혁의 대상이 돼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교육이 만신창이가 됐다고들 한다.

'왜 배우는가' 하는 근본을 망각하고 있다는 말이다.

21세기에는 '새 교육' 이 필요하지 않을까. 인간으로서의 품성을 살리는 교육, 사람답게 사는 법을 배우는 교육, 그래서 사람을 살리는 교육 말이다.

전북 부안에서 변산공동체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윤구병(尹九炳.57)씨를 성공회대 고병헌(38)교수가 만났다.

고교수는 격월간 교육전문지 '처음처럼' 의 편집위원을 맡고 있다.

-그간 우리 교육 제도의 문제점은 숱하게 지적돼왔습니다.‘학교의 붕괴’가 거론된 지 오래고‘열린 교육’이니‘대안 학교’니 하는 말도 이제 낯설지 않은 용어가 됐습니다.‘교육 개혁’이라는 구호가 교육부 장관이 바뀔 때마다 대두해 마치 시대의 명제가 된 듯 합니다.선생님은 변산 학교를 운영하면서 공동체를 통한 ‘새 교육’을 주장하셨습니다.‘새 교육’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요.

“교육을 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우선 생명체는 스스로 앞가림을 해야 합니다.개체를 유지해가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지요.그런데 혼자서는 할 수가 없지요.공동 생활을 해야 생존할 수 있습니다.그러니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익혀야 합니다.이것을 단순히 인간 사이의 관계로만 좁게 해석하면 곤란합니다.이웃이란 다른 생명체까지 포함합니다.다른 생명체와 조화를 이루며 상생하는 힘을 길러야 하는데 우리 교육은 이 부분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어요.분열과 경쟁으로 내몰고 있는 것이죠.‘새 교육’은 자연의 큰 틀 속에서 상생하는 법을 가르치는 교육입니다.”

-‘생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자각이 우선돼야 한다는 말씀으로 들리는데요.

“그렇습니다.저는 도시의 시간,즉‘문명의 시간’은 인공적인 시간이라고 봅니다.계절의 흐름과 상관없이 공간화된 시간이지요.허상입니다.이 허상에 매어 있다 보면 결국 자연을 착취하거나 자연에 기생할 수밖에 없어요.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생명의 시간’을 만들어나가야 합니다.이것을 가르치는 교사도 결국 자연입니다.”

-선생님은 ‘아이들의 손발을 놀려야 한다’고 주장하셨습니다.또‘산살림·들살림·갯살림을 가르쳐야 한다’고 하셨지요?‘생명의 시간’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경험할 수 있습니까.

“지적 호기심이 왕성할 때‘생명의 시간’과 접할 기회를 줘야 합니다.자연 속에 풀어놓고 자기 시간을 스스로 통제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지요.변산 아이들은 산과 들과 바다를 뛰어다니면서 새끼꼬기,팽이깎기,칡넝쿨이랑 솔잎으로 발효식품 담기,낫 갈기,갯벌 구멍에서 바지락 찾기,쥐불놀이 등 수많은 놀이를 통해 사는 법을 배웁니다.”

-선생님 말씀대로 자연과 더불어 손발을 놀리며 사는 것이 제도권에서 과연 가능할까요.모든 학교를 변산 학교처럼 바꾸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아닙니다.제가 말하는‘새 교육’,즉 인간을 만드는 교육은 돈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지요.발상을 바꾸면 제도권 교육에서도 실천이 가능합니다.머리만 발달하는 게 아니라 손과 발을 즐겁게 움직이면서 배울 장소를 마련하는 것,이건 큰 예산이 필요하지 않아요.가령 목공실이나 철공소,공작실을 학교 안에 갖춘다거나 여름·겨울방학 때는 바닷가에서 텐트치고 야영을 한다거나….아니면 일손 딸리는 농어촌 자원봉사만 해도 충분한 경험이 됩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교육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 더욱 절실하다고 봅니다.지금까지 우리는 본질의 문제를 제도의 문제로 환원하는 오류를 범해왔어요.큰 원칙과 철학이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시스템을 바꾸는 것에만 과도하게 초점을 맞춰왔거든요.

“동감입니다.교육은 일종의 자동화 과정입니다.자연적으로는 생명체가 복제되고 사회적으로는 관습이 반복되는‘패턴화’라고 할 수 있어요.교육을 개혁하자는 말은 이 자동화 과정이 제대로 작동이 안되니까 나오는 것이거든요.그렇다면 이제는 새로운 ‘주의(主義)’가 필요하단 얘기에요.이제는 이러한 정형화가 왜 통용되지 않는지 분석이 필요하다는 거죠.지금 교육제도의 결과로는 내가 배운 모든 지식이 낭비됩니다.졸업하면 곧바로 쓸모가 없어져요.생명력을 낭비하는 공동체에서는 쓰레기만 나옵니다.교육의 진정한 가치 회복에서부터 ‘새 교육’은 출발합니다.”

-그 말씀을 들으니 개인의 개성화,다양화를 위한 교육을 하다 보면 결국‘잡초는 없다’는 걸 깨닫게 된다고 하신 선생님의 책 구절이 생각납니다.그런데 사람들은 흔히 대안교육이나 실험학교를 바라볼 때‘별난 것을 가르치는 곳’이라고 인식하는 경향이 있어요.과연 그런가요.

“더불어 사는 공동체의 이념은 결국 모두가 너나없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궁극에 인류가 하나가 되는 것이지요.이는 맞서있는 것,대립하는 것을 없애는 겁니다.대립항이 많을수록 삶이 어려워져요.세계가 하나가 되기 위해 필요한 정보를 습득하는 것이 배움의 목표입니다.그래서 자연뿐 아니라 영어도 가르치고 수학도 가르치고 인문학·사회학·예술까지 두루 망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울한 얘기지만 현대 사회에서 교육의 가치는 인정받고 있지 못해요.기업의 생산방식이 소품종 다량생산에서 다품종 소량생산으로 바뀌면서 교육이 인간의 창의성 발휘를 위한 게 아니라 자본을 위한 기업의 교육으로 돼가고 있거든요.즉 선생님이 말씀하신 ‘생명의 시간’을 음미하고 누리는 쪽이 아니라 ‘문명의 시간’을 얼마나 더 효율화할 것인가에 신경을 쏟아부어요.차근차근 걷는 것부터 배워야 하는데 뛰게 만들고 더 잘 뛰는 인간이 우수하다고 하지요.신자유주의의 맹점입니다.

“올림픽의 3대 정신이 뭔지 아시지요?‘보다 높이,보다 멀리,보다 빨리’지요.성장 제일주의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구호에요.우스개 소리 같지만 저는 이 모토를 거꾸로 뒤집어야 우리 교육이 산다고 봅니다.‘보다 낮게,보다 가까이,보다 느리게’로 말입니다.좀더 느리게 살아야 제대로 살 수 있어요.물질과학의 틀로써 생명 현상의 결과인 사회를 파악하려는 생각을 버려야 해요.실험과 분석이 아니라 관찰을 통해 삶의 구조를 이해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도 자본의 힘은 날이 갈수록 거대해지고 복제 실험이 성공을 거듭할수록 인간의 오만은 견제하기 어려운 선을 넘어서는 것 같습니다.변산 학교 같은 대안 교육의 미래를 장담하기가 힘들다는 것이지요.가령 현대 사회에서 사회 적응력이 떨어져 결국은 낙오되는 일이 빚어지진 않을까요.

“없어야할 것과 있어야 할 것이 고루 갖춰진 세상이라면 변산에서 교육받은 아이들이 이 사회에 수월히 편입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마땅하겠지요.그런데 행·불행을 누가 가늠할 수 있겠습니까.만약 변산 공동체의 삶이 아이들의 입장에서 봤을 때 더 행복하다면 이 세상이 변산 공동체처럼 바뀌어야지 아이들보고 세상에 적응하라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물론 제도권에서 비제도권에서 배출한 학생들을 수용하려는 노력도 따라야 합니다.”

-하지만 사회에 나올 나이가 됐을 때 혼란을 느끼지 않을까요.대안교육을 실시하고 있는 많은 학교들의 공통적인 고민거리도 바로 이것입니다.

“일단 제 입장은 아이들이 공동체 학교를 통해 자신이 제대로 교육받았는지 비교할 수 있게끔 충분히 준비하게 한다는 것입니다.그 다음의 선택은 전적으로 본인에게 달려 있습니다.물론 제겐 확신이 있습니다.암담한 현실을 개선해 나가는 데 대학들도 한몫을 해줬으면 합니다.”

-2002년부터 성공회대학교에서는 실험학교 출신을 특별전형으로 받기로 했습니다.유리장 속에 넣고 바라보는 것이 아닌 이른바‘참여 관찰’이라 할 수 있겠지요.작은 시작이지만 이는 다양한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게 됐음을 의미합니다.

“제가 꿈꾸는 세상은 꼭 머리가 좋지 않고 감성이 무디더라도 무리없이 잘 살 수 있는 세상입니다.평균 이하의 지능을 가졌다 할지라도 자연의 리듬에 맞춰 일하면 안심하고 잘 살 수 있는 환경 말입니다.아이들이 자연과 교감하면서 일을 배우고,이것으로 자신의 앞가림을 하며 다른 사람들과 협동해 살 수 있는 기초를 닦게 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21세기에는 머리와 몸과 손발을 비슷하게 놀리며 사는 인간,전인(全人)적 인간을 키우는 교육이 뿌리를 내렸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정리=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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