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커스] 정치프로그램을 바꾸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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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999년 11월 17일. 세계 최대 컴퓨터 전시회인 컴덱스쇼 기조연설장에 수천명의 청중이 운집했다.

연단위에 오른 선 마이크로시스템스의 스콧 맥닐리 사장이 말문을 열었다.

그의 첫마디는 "그 독점주의자가 농담하는 것 들었어요" 였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사 회장이 기조연설을 통해 MS독점 사건의 결과가 몇 달러의 벌금으로 끝날 것이라고 말한 것을 빗댄 힐난이었다.

맥닐리의 말은 거칠게 이어졌다.

"MS는 도저히 치료할 수 없는 독점주의자들입니다. 그러나 이젠 그들도 끝났습니다. MS가 주도해온 개인용 컴퓨터(PC) 운영체계와 소프트웨어 시장 자체가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죠. " 판이 바뀐다는 이야기였다.

빌 게이츠 저격수로 불리는 맥닐리의 MS 대체논리는 이랬다.

"실제로 사람들은 PC기능의 10분의 1도 제대로 이용하지 않습니다. 인터넷에서는 스쿠터(소형 오토바이)면 충분한데, 수십t짜리 트럭을 사고 있는 셈이죠. 이젠 비싼 값의 PC 운영체계와 소프트웨어를 일일이 구입할 필요가 없습니다. 인터넷을 통해 모두 무료로 제공받고 여러분은 사용료만 지불하면 그만이니까요. 선 마이크로시스템스는 이에 필요한 모든 기술을 가지고 있습니다. "

실제로 선 마이크로시스템스는 MS의 '윈도' 에 의존하지 않고 다양한 응용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는 '자바(JAVA)' 와 MS의 '오피스' 를 능가하면서도 공짜인 '스타오피스' 를 선보이고 있다.

물론 MS의 독점 성벽은 여전히 높고 견고하다.

단지 '바꿔' 라고 말만 하거나 독점금지법을 걸어 MS를 분사(分社)시킨다고 위협해서 MS의 시장독점이 해소될 것 같지는 않다.

MS의 시장독점을 부수려면 MS가 이룬 것을 대체할 그 무엇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스콧 맥닐리 사장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손에 잡히는 대안' 을 내놓으며 이렇게 말한다.

"PC와 윈도는 어제의 뉴스다. " 세계 IT업계에서 그가 '빌 게이츠를 잡을 확실한 저격수' 로 통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인터넷과 자바가 오늘의 뉴스" 라며 바꿀 대안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밀레니엄의 벽두부터 우리 역시 '바꿔' 의 도가니에 빠져버렸다.

시민단체들이 다가오는 총선에서 물갈이해야 할 국회의원 명단을 공개하면서 '바꿔' 의 도가니는 달궈지기 시작했다.

시민단체들의 정치참여를 가로막던 선거법 87조의 폐지를 둘러싼 논쟁이 물먹은 장작처럼 열기보다 매운 연기만 피우는가 싶었지만, 여야 할 것 없이 한마음으로 게리맨더링을 일삼으며 날탕 선거법을 내놓자 이내 '바꿔' 의 도가니는 마른 장작으로 불지펴진 형국이 되어버렸다.

여차하면 '바꿔' 의 도가니마저 끓어넘쳐 뒤엎어질 만큼 시민적 불복종의 분위기가 급속히 번져갔고 마침내 기성 정치권이 두 손을 들어버렸다.

그러나 두 손을 들었다고 승부가 나는 것은 아니다.

확실히 바꾸려면 분명한 대안이 있어야 한다.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된다" 는 식으로는 약하다.

결국에는 능수능란한 정치권에 또 당한다.

'바꿔' 라고 으름장을 놓는다고 바뀔 정치권이 아니지 않은가.

기성 정치권은 명백한 독점주의자다.

하지만 그들을 견제할 독점금지법이 우리에겐 없다.

또 그들이 정치시장에 뿌려놓은 선거운영방식, 당운영방식, 정치자금운용방식 등을 대체할 구체적 프로그램을 우리는 아직 갖고 있지 못하다.

문제는 그것이 나와야 한다.

선 마이크로시스템스가 MS의 윈도와 오피스를 대신하는 프로그램을 갖고 덤벼들 듯이 분명한 대체프로그램을 가질 때만 정치시장의 물갈이가 실제로 가능할 수 있다.

여전히 기존의 눈맞추기 공천프로그램, 권위주의적 당운영 프로그램, 나눠먹기식 정치자금 프로그램을 그대로 용인하면서 낙선.당선운동을 한다고 해봤자 여차하면 '때 덜묻은 것' 타령만 부르다 말 가능성이 짙다.

기왕 팔 걷어붙이고 나선 김에 좀더 가자. 이판에 "프로그램을 바꾸자!"

정진홍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 필자약력〓성균관대 졸업, 동대학에서 커뮤니케이션학으로 박사학위. 중국 옌볜(延邊)대 겸임교수 거쳐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저서 '커뮤니케이션 중심의 제시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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