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美청소년의 테이프붙이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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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미국 워싱턴 DC 인근에 사는 대니얼(15)군의 바지 끝부분과 신발 앞창에는 회색 롤 테이프가 흉물스럽게 둘둘 붙어 있다. 옷이 해지거나 신발이 닳으면 테이프를 꺼내 적당히 잘라 해지거나 터진 곳에 붙이고 다니는 것이 대니얼의 생활 습관이다.

그래서 그의 책상서랍 속에는 항상 롤 테이프가 들어 있다.

그렇다고 대니얼이 새 옷과 새 신발을 살 돈이 없는 것은 아니다. 보다 못한 부모가 새 것을 사주면 그는 테이프도 충분한지 살펴본다. 새 신발이 다 떨어질 때를 대비하기 위해서다. 비단 바지와 신발뿐만 아니다. 대니얼의 교과서와 노트에도 테이프가 덕지덕지 붙어 있다.

워싱턴포스트지는 18일자 '스타일' 섹션 커버스토리에서 대니얼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최근 미국의 어린 학생들 사이에 유명 상표의 제품을 사러 쇼핑 가는 대신 입던 옷과 개인 물품에 테이프를 붙여 사용하는 게 인기를 끌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그러면서 "우리는 이를 '유행' 이라 부르지 않는다. 유행은 일정한 '사회적 틀' 이기 때문에 청소년들은 유행이라는 말을 싫어한다. 청소년들에게 이는 '실용' 이다" 고 덧붙였다.

포스트지에 따르면 '테이프 붙이기' 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에서 고안됐다. 탄약박스 안으로 습기가 차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뒤 미국 가정에서 가정용품 재활용 방안으로 일상화됐다.

미국은 지금 엄청난 호황을 누리고 있다. 그럼에도 미국인들의 '테이프 붙이기 실용성' 은 못살 때나 잘 살 때나 여러 세대를 거쳐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다.

최근 서울 서대문 재활용센터는 "외환위기가 끝나자 중고품을 찾는 손님이 크게 줄었다" 고 한숨지었다.

국내 언론들도 "IMF를 벌써 잊었나" 며 "외환위기의 한 원인인 도덕적 해이가 다시 문제가 될 수 있다" 고 경고하고 있다.

"겉으로만 번지르르한 지나친 외양에 무관심한 것, 그것이 궁극적인 유행 아닐까. " 포스트지가 뉴욕의 유행 리서치회사 잔디 그룹의 이르마 잔디 회장의 말을 인용해 던진 말이다.

정선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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