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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수류탄에서 원자로까지 (32)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8면

(32) 생각지 못한 행운

김성진(金聖鎭.69.전 과기처장관)국방과학연구소(ADD)부소장은 한사코 "벌컨포 문제에 대한 최종 보고는 당신이 해야 한다" 고 주장했다.

부하의 공(功)을 절대 가로채지 않겠다는 배려였다.

내가 거듭 거절했지만 막무가내였다.

나는 부하를 생각하는 그의 마음씨가 너무 고마웠다.

1978년 1월초 어느날. 나는 심문택(沈汶澤.98년 작고)ADD 소장을 모시고 노재현(盧載鉉.74)국방장관을 만나러 갔다.

국산 벌컨포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그간의 연구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盧장관은 박정희 대통령이 국산 벌컨포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지라 내 보고를 무척 궁금해 하는 눈치였다.

"장관님, 국산 벌컨포가 자꾸 발사 사고를 일으키는 것은 풍산금속에서 만든 국산 벌컨탄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벌컨탄의 뇌관(雷管)과 추진제(推進劑)재료가 불량품입니다. 그 책임은 당연히 불량품 재료를 제공한 미국의 오린社가 져야 합니다. "

盧장관은 아주 만족스런 표정이었다.

그는 환하게 웃으며 나를 격려했다.

"밝혀 내기가 쉽지 않았을텐데. 누가 잘못 했는지 명확하게 드러났군. 이렇게 명쾌한 보고는 처음이야. " 그러더니 그는 "풍산금속이 우리 국방부에 40억원의 손해배상을 하고 그대신 풍산은 오린社로부터 손해배상을 받아내야겠지" 하고 지적했다.

나는 "그렇다" 고 대답했다.

盧장관을 비롯, 장관실에 모여 있던 국방부 관계자들은 한시름 놓았다는 표정이었다.

그날 저녁 국방부에서는 그간의 노고를 위로하는 파티가 열렸다.

그 자리에서 이범준(李範俊.72.동아대 재단이사장)국방부 방위산업차관보가 내게 다가 오더니 盧장관이 한 말을 전해줬다.

"韓박사, 아침에 자네가 장관실에서 나간 다음 장관께서 '자네가 군인이냐' 고 내게 묻더군. 내가 자네를 그때 처음 봤잖아. 그래서 내가 얼떨결에 군인이라고 대답했지. 그랬더니 장관께서 '저런 군인은 절대 군에서 내 보내면 안 돼. 꼭 진급을 시켜 붙잡아 두라구' 하시더군. "

사실 나는 1970년에 공군 중령으로 진급, 1978년 6월이 계급 정년이었다.

나로서는 불과 6개월 안에 대령이 못되면 '무능군인' 으로 낙인 찍혀 군복을 벗어야 할 참이었다.

그런데 당시 야전(野戰)조종사들도 자리가 없어 진급을 못하는 판이었다.

그러니 군복도 입지 않은 군 과학자가 대령으로 진급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러나 나는 국산 벌컨포 문제를 해결한 덕에 운좋게 1979년 1월 대령으로 진급했다.

盧장관의 특별 배려로 계급정년이 지났음에도 6개월간 군 생활을 계속 한 셈이었다.

당시 ADD에는 대령 진급 자리가 할당되지 않았었다.

그런 나를 두고 ADD에서는 '공군 대령' 이라고 부르지 않고 '벌컨 대령' '국방부 대령' 이라고 부르곤 했다.

한편 주한 미 군사고문단에서는 국산 벌컨포 사고 책임이 오린社에 있음이 분명해지자 조속한 문제해결을 위해 발벗고 나섰다.

특히 매클로이 육군 상사가 해결사로 나섰다.

나중에 그는 오린社와 전화 통화한 녹음 테이프를 나에게 건네줬다.

들어보니 그는 무려 두 시간이나 오린社 관계자들을 다그쳤다.

전적으로 오린社에 책임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육군 상사를 가장한 미 정보기관의 실력자임에 틀림없었다.

그와 여러번 미국을 방문할 때마다 그런 심증을 거듭 확인할 수 있었다.

미국에서는 누구나 그를 '맥 장군' 이라 불렀다.

가는 곳마다 그는 귀빈 대접을 받았고 아는 것도 많았다.

나는 그의 탁월한 실력에 번번히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1978년 봄, 유찬우(柳纘佑.99년 작고)풍산금속 사장이 나를 찾아왔다.

그는 밝은 표정으로 "오린社를 상대로 국제소송을 제기해 손해배상은 물론 벌컨탄을 동남아로 판매할 수 있는 권리까지 확보했다" 며 내게 거듭 감사를 표시했다.

일년도 채 안 돼서 국산 벌컨포 문제가 말끔히 해결된 셈이었다.

글= 한필순 전 원자력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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