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원입법 백화제방 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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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일과 4일 오후 국회 본회의장. 상임위를 거쳐 올라온 과거사법.남북교류협력법 개정안 등 76건의 법안이 이틀에 걸쳐 차례차례 통과됐다. 이 가운데 정부가 제출한 법안은 우주개발진흥법.환경정책기본법 개정안 등 6건. 정부 제출 법안과 국회의원 발의 법안을 함께 심사한 뒤 상임위에서 대안을 만들어 올려보낸 경우도 국가보훈기본법안 등 8건에 불과했다. 나머지 62건은 여야 의원들이 발의하고 논의해 만든 법안들이었다. 본회의장에서 의사국장은 지난달 26일 본회의 이후 국회에 새로 접수된 법안을 소개했다. 여기서도 의원 발의 법안이 23건, 정부 제출 법안이 4건이었다.

하루 앞선 2일 밤 국회 법사위. 김승규 법무부 장관이 출석해 여야 의원들이 발의한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에 대해 반대 의견을 거듭 피력했다. "수사 목적을 위해 전화통화 내역 조회의 법원 허가제는 신중히 검토해야 한다"는 장관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의원들은 개정안을 그대로 밀어붙였다.

의원 입법 시대가 열렸다. 17대 국회 1년여 만의 뚜렷한 변화다. 국회 사무처에 따르면 17대 국회 들어 본회의에서 처리된 의원 발의 법안 건수가 정부 제출 법안 건수를 크게 앞질렀다. 4월 중순까지 의원발의 법안은 349건이 처리(가결.부결.폐기 포함)됐다. 이 가운데 가결된 것만 159건이다. 반면 정부 제출 법안은 170건이 처리(가결은 118건)됐다.

의원 발의 건수도 17대 국회 들어 이미 1000건(4일 현재 1319건)을 넘어섰다. 16대 같은 기간(356건)에 비해 3배 이상이다. 반면 정부 제출 법안은 17대 231건으로 16대 같은 기간 205건에 비해 13% 증가하는 데 그쳤다. 정부 제출 법안의 가결 건수(118건)는 16대 같은 기간(156건)에 비해 오히려 24% 감소했다. 이에 따라 의원 발의 법안과 정부 제출 법안의 가결건수 비율은 16대 국회에서 22% 대 78%이던 것이 17대 국회에선 57% 대 43%로 역전됐다.

14~15대 국회에선 정부 제출 법안의 비중이 훨씬 컸다. 이수용 국회 사무처 의안과장은 "헌정 사상 처음으로 의원입법이 가장 강력한 입법 통로로 자리잡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과거에는 정부가 주도하는 입법 형식 때문에 국회는 '통법부(通法部)'라는 부정적 평가를 받았다"며 "이제 국회가 '입법과 정부 견제'라는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오명을 벗을 수 있게 됐다"고 했다.

의원입법의 양적인 팽창 외에 질적 개선도 눈에 띈다. 국회 내 입법지원 조직을 활용해 개정안뿐 아니라 제정안을 발의하는 의원도 크게 늘었다. 정부법안을 국회에서 수정하는 사례도 늘어났다.

정치권.학계 등은 이런 변화에 대해 대체로 긍정적이다. 국민과 직접 접촉해 다양한 입법 수요를 빠르게 받아들일 수 있고, 정부가 미처 신경쓰지 못하는 사회적 소수자들을 대변할 수 있다는 점 등을 꼽는다. 그러나 정부 관계자 사이에선 "아직 의원들의 입법 전문성이 부족하고, 가결률이 14%에 머무르는 등 걸음마 수준"이라는 지적도 있다.

김정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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