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골목은 추억의 박물관 그 소소한 흔적을 기록하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39호 03면

사진, 이필석

“초등학교 2학년 찬영이는 줄넘기 6급을 따기 위해 열심히 줄넘기 연습을 하고 있다. 찬영이는 고양이가 자기 ‘웬수’라며 고양이가 나타나기만 하면 힘차게 달려가 쫓아버린다. 골목마다 똥을 싸놔서 지뢰 같다고도 했다. 이렇게 고양이를 싫어하는 아이는 처음이다. 찬영이네 집 바로 맞은편 집은 예전에 불이 나서 지금 아무도 살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 그 집이 고양이 소굴이 됐고, 고양이들이 활개를 치나 보다. 찬영이는 줄넘기를 하다가 계단을 오를 때 잡는 철로 된 봉 위에 올라가 눕더니 ‘좀 쉬어야겠어요’ 한다. 너무 아슬아슬해 보여 그러다 떨어지겠다 걱정을 하니 찬영이는 ‘제가 태어날 때부터 있었어요. 그래서 여기 누워있는 게 아주 편해요’란다. …”

2009년 10월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 한 골목에서 만난 아홉 살 찬영이의 이야기다. 이게 뭐야, 싶을 사소한 사연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기록이 모이고 모이면 역사가 된다. ‘2009년 북아현동’의 역사가. 군데군데 빈집이 있었고, 고양이들이 그 집의 주인이 됐고, 가파른 골목 계단에서 아이가 놀았구나, 알게 되는 것이다. 위대한 영웅담이 아닌 소박한 일상사를 담는 작업. 지금 북아현동에선 그 기록 작업이 한창이다. 북아현동은 뉴타운 개발 예정지로 2005년 지정됐다. 지금 모습이 역사가 될 날이 몇 년 남지 않았다.

(사진2ⓒ 이필석,사진3ⓒ 김명은,사진4ⓒ 노경완)1~4 서울 북아현동 골목길. 아이들과 고양이의 놀이터가 되고, 고추를 말리고 채소를 심는 마당도 된다. 5~7 추계예대의 “골목에서 ‘주름’잡기” 프로젝트. 담장 칠이 벗겨진 흔적을 따라 거울을 붙이고(5. 김성군 작), 주민과 함께 ‘계단화(6)’를 그리고, 골목길 풍경을 미니어처로 재현했다(7. 조은정 작).

찬영이의 이야기는 추계예대 판화과 1학년 이진영씨가 채집한 사례다. 북아현동에 자리 잡은 추계예대는 올 개교 35주년 기념 행사 중 하나로 “골목에서 ‘주름’잡기”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제목의 ‘주름’은 조선시대 부동산중개업자 역할을 했던 ‘가쾌(집주름 또는 집주릅)’에서 유래했다. 집주름은 한 동네에 오래 머물러 살면서 가가호호의 내밀한 사정까지 훤히 꿰뚫고 있는 사람을 칭한다. 프로젝트 지도를 맡은 판화과 정원철 교수는 “이 지역에서 35년을 산 ‘주민’의 입장에서 우리 이웃을 속속들이 아는 집주름이 돼보자고 나선 것”이라고 설명했다.

추계예대 미술학부 학생ㆍ동문 90여 명이 참여해 지난 4월 시작한 이 프로젝트는 ‘끝나지 않은 이야기’ ‘맛집 찾기’ ‘쪽지로 남는 도시 북아현동’ ‘미미(美米)의 북아현데이’ 등 스물 네 가지 주제로 나눠 진행됐다. 저마다의 방법으로 북아현동 삶의 흔적을 남겨보자는 시도다. 동네를 알기 위한 접근법은 다양했다. ‘북아현동 아카이빙’ 팀은 건축물의 외관에 집중했다. “새로운 삶이 인스톨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포맷 직전의 현장을 아카이빙하고자 한다”는 포부로 동네 구석구석을 꼼꼼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사진7

“보통의 지붕에는 다른 무언가가 올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북아현동의 지붕은 달랐다. 방 안에 있음직한 장판들이 지붕에 떡하니 올려져 있고, 장판이 날아가지 않게 돌도 올려놓았다. 비닐하우스에서 쓸 것 같은 비닐들이 지붕 곳곳에 덧붙여져 있는 모습도 흔히 볼 수 있다. 아마도 비가 새서 그러지 않았을까. 어느 집의 지붕 위에는 화분과 하얀 비닐, 남은 기와 등 지붕과 잘 어울리지 않는 여러 가지가 한꺼번에 올라가 있다. 또 천막으로 그냥 지붕을 다 덮은 집도 있었다. 아무래도 계속 보수할 곳이 생긴 나머지 귀찮아서 천막으로 다 덮은 것 같다.” 동양화과 3학년 최광민씨의 관찰기록이다.

그뿐인가. 대문에 열쇠 대신 숟가락을 꽂아 잠그고, 한옥 기와 지붕 위로 양옥 형태의 2층을 올리고, 못 쓰게 된 자개장롱의 문짝을 대문으로 사용하고, 빨랫줄에 조기를 널기도 하는 등 어디서도 보기 힘든 북아현동만의 풍경은 계속 이어졌다.‘맛집 찾기’ 팀은 골목골목 숨겨진 맛의 비밀을 알아내는 작업에 나섰다. 네 명의 팀원이 골목으로 무작정 ‘답사’를 떠났다. 차가 들어오지 못하는 좁은 골목길은 주민들에게 공동 거실이었다.

평상에 앉아 화투놀이를 하는 할머니들이 오늘의 ‘요리 선생님’이다. ‘오징어튀김의 달인’으로 소문난 장정순 할머니에게선 마른 오징어 튀김을 배웠다. 물오징어가 징그러워 못 먹겠다는 막내딸을 위해 개발한 메뉴란다. 마른 오징어를 하룻밤 불려놓는다. 밀가루와 튀김가루를 섞어 반죽을 만들고, 오징어를 설탕과 다시다에 버무려 간을 하면 기막힌 오징어튀김이 탄생한다는 것.

이렇게 동네 곳곳 ‘달인’들을 찾아다니며 육개장과 김치 만드는 방법도 배웠다. 자연히 각 집의 부엌 살림도 알게 됐다. 골목이 부엌 역할을 톡톡히 하는 집도 많았다. 좁은 부엌 대신이다. 대문 밖으로 수도 호스를 끌어와 골목에서 재료를 씻고 다듬었다. 도마까지 골목으로 나왔다. 도마를 땅바닥에 놓고 쭈그리고 앉아 채를 써는 주부의 손길이 바쁘다. 골목은 그렇게 거실도 됐다, 부엌도 됐다, 놀이터도 된다. 쓰임새 많은 보자기 같은 존재였다.

북아현동 주민들의 속내는 ‘이름하여 이음’ 팀이 찾아 나섰다. 동네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스스로에게 상장 주기’ ‘북아현동에게 상장주기’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다. “몸은 아프지만 마음은 18세 청춘으로 명랑하고 활기차게 하루하루를 즐겁게 지내므로…” “나이는 비록 70을 넘었지만 20대 못지않은 생활을 하고 있으므로…” 등이 스스로에게 상을 주는 주민들의 사연이었다. 북아현동은 주민들에게서 ‘천국의 마을상’과 ‘개 천국상’을 받았다.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보다 더 아름다운 밤 풍경…” “이 동네는 개를 키울 환경이 되지는 못하나 유기견들의 천국으로 항상 개를 키우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개와의 만남을 주선해 주므로…”란 이유에서다. 짧은 글 속에서도 주민들의 애환과 희망이 드러났다.

학생들은 6개월 동안 기록한 북아현동의 이야기를 조형물과 영상, 퍼포먼스 등 다양한 방식으로 재구성했다. 그 결과물들이 10일까지 추계예술대 구내와 주변 골목에서 전시된다. 문의 02-362-4514.

북아현동을 기록하는 모임은 또 있다. 2006년부터 도시경관기록보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사단법인 ‘문화우리’다. 기록이라는 과정을 통해 소멸돼가는 도시 경관을 탐구하고자 시작한 프로젝트다. 그동안 서울 아현동과 신월동, 세운상가와 낙원상가 등 여섯 곳을 기록했다. 이미 북아현동 바로 옆 아현동에 대한 작업을 마친 상태. 문화우리가 북아현동 기록에 또 나설 이유는 사실 없었다. 그런데 지난해 말 북아현동 주민들의 요청이 들어왔다. 우리 동네도 관찰하고 기록해달라는 요구였다.

문화우리는 올 6월부터 주민들과 함께 동네 곳곳에 다니며 북아현동의 모습을 끄집어냈다. 막혀있는가 싶지만 가까이 가보면 또 새 길과 연결돼 있는 꼬불꼬불 골목길, 한 치의 빈 땅도 놀리지 않고 아욱ㆍ고추ㆍ상추ㆍ부추 등을 심어놓은 텃밭, 금화장길 부근에 유독 많은 노란색 나무 대문 등을 있는 그대로 카메라 속에, 기억 속에 담았다.

문화우리 이중재 사무국장은 “동네 답사를 하는 동안 주민들은 길 이름의 유래와 학교의 역사 등 저마다 자기가 알고 있는 동네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워했다”면서 “동네 얘기를 할 일이 없는 도시민들이 그런 대화를 나눴다는 것 자체가 경이로운 경험”이라고 말했다. 문화우리는 그동안 찍은 북아현동 사진을 모아 16∼20일 서울 지하철 충정로역에서 전시회를 열 계획이다.
문의 070-7563-6914.


<기록이 남긴 것은 무엇인가>
추계예대와 ‘문화우리’의 북아현동 탐구 도구는 ‘기록’이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문자와 이미지·영상으로 옮겨두는 것이다. 기록은 중립이다. 마냥 미화하는 기록도, 마냥 고발하는 기록도 의미가 없다. 기록은 현실을 알기 위한 작업이고, 그 과정을 통해 우리 마을의 정체성을 찾자는 활동이다. 그래서 기록 자체가 개발을 찬성하거나, 반대하지는 않는다. 추계예대 정원철 교수는 “없어져서 아쉬울 것들을 찾아내 재개발 이후 아파트의 생활양식에 이식할 수는 없을까. 그 실마리를 예술의 방법에서 찾아보자는 프로젝트였다”고 말했다.

문화우리에 북아현동 프로젝트를 적극적으로 제안했던 북아현 3구역 재개발 조합원 한지원(39)씨도 비슷한 말을 했다. “동네에 소방차가 들어와야 되고, 물도 잘 나와야 되고, 쓰레기도 안 굴러다녀야 된다고 생각하는 측면에선 나도 개발론자”라며 “하지만 옛 모습을 보존하며 개발할 방법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옛 삶의 흔적과 켜를 간직한 도시의 성장 방법은 무엇일까. 아직 결론은 못 내렸다. 하지만 결론을 이끌어낼 재료는 많이 쌓였다. 기록을 통해서다. 그 속에 답이 있을 터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