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기 왕위전 도전기 4국' 이창호의 낮은 포복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0면

제38기 왕위전 도전기 4국
[제4보 (55~76)]
黑.이세돌 9단 白.이창호 9단

사태를 잘 모르는 사람은 대체로 강경하다. 처음엔 조심스럽다가 자신의 대응이 혹시 비겁하거나 허약한 자세가 아닐까 생각해 문득 초강경으로 돌아선다.

상수와 하수의 접전에서 이 같은 현상이 자주 목격된다. 상대를 상수로 인정하며 조심하던 하수가 어느 순간 '이건 나를 너무 무시하는 행위 아닌가'하고 울컥해 강수로 대응한다. 사실은 참는 것이 정수이고 비겁하지도 않은데 혼자서 그렇게 느낀 나머지 턱없는 강수를 두어 자멸하고 마는 것이다.

왜 이런 얘기를 하느냐 하면 상변 58부터 이창호9단이 보여주는 낮은 포복의 자세가 참으로 놀랍기 때문이다. 프로들조차 설마 그렇게까지 기겠느냐 하는 곳에서 그는 서슴없이 기었다. 우변의 64도 마찬가지다. 그 놀라운 인내를 보며 반발을 예상했던 많은 고수가 속으로 '나는 아직 하수구나'생각했을 것이다.

상대가 강할 때는 참는다. 불리한 싸움을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이창호도 내가 강한 곳에서는 용서가 없다.

하변에서 이세돌9단이 71, 73의 강력한 도발을 감행해 왔을 때 74는 실로 절호의 타이밍이었다(72가 놓이기 전에는 A로 받아 후수가 된다). 이 한수로 뒷맛 나쁘던 중앙 백이 튼튼해졌고 이로 인해 싸움의 주도권이 뒤바뀌었다. 76으로 뚝 끊자 이세돌은 고민에 휩싸인다. '참고도'흑 1, 3으로 돌파할 계획이었으나 지금은 왼쪽 흑대마가 곤마로 돌변한 터라 그게 불가능해졌다. 그렇다면 71, 73은 대악수가 아닌가.

박치문 전문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