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24시] 한·일 우호 '작은 역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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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동해와 면한 일본 돗토리(鳥取)현 아카사키(赤□).

인구 9천여명인 이 마을의 새해 소망 중 하나는 19세기 초 인연을 맺었던 조선인 12명의 후손 찾기다.

당시 상선을 타고 강원도 평해군(현재의 경북 울진군)을 떠난 12명은 이 마을 앞바다에서 표류하다 구조돼 3개월 동안 묵다가 조선으로 돌아간 것으로 사료는 기록하고 있다.

후손 찾기에는 이 마을은 물론 가타야마 요시히로(片山善博)현 지사도 팔을 걷어붙이고 있다.

한.일 우호.선린의 뿌리를 찾아 교류의 새 지평을 열기 위해서다.

돗토리현 주민들이 조선인 후손 찾기에 나선 것은 91년 현립 도서관에서 발견된 '표류 조선인 그림' 족자에서 비롯됐다.

윗부분은 선장 안의기(安義基)가 돗토리번(藩)에 보낸 감사문(한자), 가운데는 安선장이 한글로 쓴 조난 상황, 아래는 일본인 화가가 그린 12명 선원의 모습이 들어 있다.

한글.한문.일본화로 된 이 족자는 당시 동아시아의 한 단면을 엿보게 해주는 귀중한 사료이기도 하다.

돗토리현이 족자를 바탕으로 한.일 양국의 사료를 훑은 결과 동해를 사이에 둔 풀뿌리 교류가 숨어 있었다.

1819년 1월 평해를 나온 安선장 일행은 열흘만에 폭풍에 휩쓸려 표류하다 아카사키 관헌에 의해 목숨을 건졌다.

달포쯤 이 마을에서 보호를 받은 이들은 돗토리시쪽으로 숙소를 옮겨 3개월 동안 묵는다.

이후 번측의 도움으로 나가사키(長崎)항.쓰시마(對馬)섬을 거쳐 그해 9월 부산항으로 돌아온다(왜관일기).

족자에 나온 감사문은 安선장이 돗토리를 떠나면서 전달한 것으로 고마움과 아쉬움이 배어 있다.

"…일행이 은혜를 갚지 못하고 돌아가게 돼 유감입니다. 헤어지면 만리(萬里)가 떨어져 어떻게 다시 만날 수 있겠는지요…. "

일행은 귀환 후 그해 11월 돗토리로 가는 보은(報恩)의 사례품과 감사문을 쓰시마쪽에 보냈다.

16세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19세기 말 일제 침략을 떠올리기 어려운 정다운 교류다.

족자의 반향은 컸다.

족자가 전한 1백80년 전의 비사는 주민들의 입에 오르내렸고 현은 '환동해 한.일 교류의 뿌리 조사사업' 에 나섰다.

94년에는 울진군을 찾아 현지 조사를 벌였고 이듬해엔 아카사키 해변에 족자가 든 기념비를 세웠다.

현과 아카사키측은 족보학자를 찾아다니고 현지 조사를 거듭하기도 했다.

그러나 후손 찾기는 아직 실마리를 풀지 못하고 있다.

아카사키정 나카니시 가즈히로(中西和弘)기획과장은 "조사단이 올해 울진에 다시 갈 것" 이라며 "새 천년의 원년인 올해에는 후손을 찾는 꿈이 영글어 19세기의 한.일 유대를 재현하고 싶다" 고 말한다.

새 천년의 한.일 관계는 더도 말고 安선장 일행과 돗토리번의 교류 같기를 기대해보고 싶다.

족자에 나와 있는 명단(나이는 당시)은 다음과 같다.

安義基(50) 權仁宅(50) 金三伊(60) 安伊宅(43) 田成喆(32)金日孫(50) 安用太(39) 沈正孫(40) 李用坤(32) 安用宅(38) 李德守(43) 崔五福(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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