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친의 정치 역정] 러시아 '민주혁명' 완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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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만큼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평가를 받아온 인물도 흔치 않다. 러시아 보수주의자들의 시각에서 바라본다면 옐친은 나라경제를 절단내고 민중의 생활을 도탄에 빠뜨린 지탄의 대상이었다.

반면 개혁과 역사발전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는 분명히 러시아의 거인이었다. 심지어 옐친을 20세기 세계사에 큰 획을 그었던 사회주의혁명의 대부 레닌에게 견주는 시각도 있다. 1917년 공산혁명의 영웅이 레닌이었다면 이를 뒤엎는 민주혁명의 주인공은 바로 옐친이기 때문이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이 제안한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가 세계의 찬사를 받던 1980년대 말만 해도 고르바초프의 그늘에 가려 있던 옐친이 일약 역사의 중심 인물로 등장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그가 지닌 타고난 결단력과 승부근성 때문이었다.

1991년 8월. 옛소련의 강경 보수주의자들이 일으킨 쿠데타로 민주주의와 개혁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을 때 쿠데타군의 탱크에 올라 목숨을 걸고 쿠데타의 부당함을 역설, 결국 쿠데타를 저지시킨 옐친의 용기와 단호함은 러시아 국민들과 세계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1991년 12월 독립국가연합(CIS) 결성을 주도, 고르바초프와 옛소련의 운명이 종말을 맞았고 1993년 10월 보수파들이 장악한 의회를 강제 해산하는 과정에서도 결단력의 정치가로서 옐친의 면모는 유감없이 발휘됐다.

그의 대통령 재선 또한 패배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의 승리였다. 러시아 사회 전반에 걸친 생활고와 사회혼란 등 개혁에 따른 부작용으로 1996년 초만 해도 옐친의 재선 가능성을 믿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옐친은 그해 여름 대통령선거에서 알렉산드르 레베드와의 제휴를 성공시킴으로써 대권 고지에 재입성, 1기 집권 때보다 더욱 강력한 리더십을 확보했다.

옐친에 대한 이같은 긍정적 평가의 이면에는 분명 부정적 평가가 공존하고 있다. 국민에게 최소한의 의식주 생활을 보장해 줬던 사회주의체제가 일시에 붕괴되면서 시장경제에 적응하지 못한 대다수 국민은 빈곤의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개혁의 완수를 앞세워 강력한 리더십을 구축한 옐친 개인에 대해선 '현대판 차르(황제)' 라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옛소련 시절 옐친 자신이 그토록 비난했던 특권층의 부패와 권력남용이 재현됐으며 민영화 과정의 부작용으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화됐다.

옐친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났지만 그에 대한 총체적 평가를 내리기에는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할 수 있다.

옐친이 러시아의 새로운 시대를 연 영웅인지, 아니면 권력 획득에 뛰어난 감각을 지닌 단순한 정치 풍운아였는지는 앞으로 러시아가 어떻게 부활의 길을 걷게 될 것인지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옐친이 걸음마를 갓 시작한 러시아 민주주의를 파괴하려던 공산주의자들의 여러차례에 걸친 시도를 저지한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의 업적은 평가받을 만하다.

모스크바〓김석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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