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602.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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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제13장 희망캐기 37

그러나 어부들은 그녀의 수상쩍은 모습을 임신으로 보지 않았다. 장돌뱅이 생활로 전전하면서 몇 다발 챙겼다는 자세(藉勢)를 부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고 영동식당을 찾아올 때는 친숙하게 지냈던 승희를 만나 바닷가에 들이닥친 애옥살이를 위로받으려 했던 기대도 없지 않았는데 돈 벌었다는 유세만 뒤집어쓴 꼴이었다. 점차 배알이 뒤틀렸던 그들은 변창호가 교도소에 들어가 썩고 있는 것은 세상 물리에 서툰 한철규라는 위인의 경솔한 처신 때문이란 것으로 못박으면서 승희도 은근히 싸잡아 공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승희는 그들의 공격에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한철규를 극구 역성 들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들은 자신이 기피하고 있었던 주문진까지 당도한 속 깊은 사연을 모르고 있었다. 주문진으로 오는 자동차 안에서 그녀는 비로소 그것을 깨달았다. 그녀로 하여금 주문진까지 별다른 앙탈 부리지 않고 당도하게 만든 사람은 감옥에 있는 변씨였다. 높은 담장 안에 갇혀 있는 사람이 담장 밖에 있는 사람을 움직이게 만든 것이었다. 그 단초가 겉보기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변씨의 안부편지였다. 안부 이외엔 아무런 메시지가 없었던 그 한 장의 편지가 아니었다면 승희는 그토록 빨리 청해식당을 떠날 엄두는 내지 않았을 것이었다. 편지를 받은 그녀는 한철규가 행여 그녀의 소재지를 눈치챌까 서울이나 혹은 다른 지방으로 떠날 결심을 갖게 되리라는 것을 예견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철규로부터 달아나려 했던 여정은 승희 자신도 모르게 그를 찾아가는 여정으로 바뀌어 버렸다. 승희의 내심을 복기(復碁)하듯 사려 깊게 반추하고 참을성 있게 꿰뚫어 보지 않았다면, 지금 승희가 서 있는 자리는 달랐을 것이었다. 변씨가 묵호댁의 임신까지는 꿰뚫고 있진 않았겠지만 조만간 그녀가 주문진에 당도하게 되리라는 것만은 분명히 믿고 있었다. 그래서 변씨가 예견하고 있는 여정을 그녀는 지금 자로 잰듯 잰걸음으로 밟아 가고 있는 셈이었다. 사람의 운명이란 그처럼 덧없는 것이면서도 낯설거니 낯익은 이웃들과 실타래처럼 엉켜 있거나 조종되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섬뜩하게 터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기피하려고 애썼던 한철규의 사람이 되어 그가 손상될까 두려워 편역 들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그녀를 들었다 놓았다 하고 있는 어부들 역시 그녀에겐 소중한 사람들이란 생각이 불쑥 치밀어올라 눈물까지 글썽이고 말았다.눈 가장자리에 눈물 자국이 배어나오자 어부들은 변씨의 고초가 한철규 때문이 아니라면, 두번 다시 거론하지 말자며 자리를 떴다.

그날 밤은 묵호댁과 잠자리를 같이하고 싶었다. 행여나 묵호댁의 변덕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틀 동안 같이 기거하면서 눈치를 살폈으나 생색은 끝간 데 없었지만 변덕을 찾아볼 수 없었다. 낳기로 결심을 굳힌 것이 분명했다. 묵호댁이 그런 결심을 굳힌 이면에는 물론 영동식당을 그녀에게 전세금 없이 5년 동안 빌려준다는 약속이 주효했음직했다. 그동안 다른 일행들은 한철규가 가을에 상주와 청도의 둥시 산지를 찾아다니며 차떼기로 구입해 보관시킨 냉동창고를 찾아가 보관상태를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출발했다.출발하는 당일 변씨 집에서는 다시 한번 북새통이 벌어졌다.언제나 늑장을 부리는 것은 박봉환 내외였고 까닭은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젖먹이 하나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희숙은 주문진에서도 다시 미장원엘 다녀왔다. 그녀가 그토록 외양에 신경쓰는 까닭을 알고 있는 사람은 손씨 아내 이외엔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지난 여름 박봉환이 중국에 체류할 동안 한철규와 동행으로 서울 동대문시장으로 물건을 구매하러 간 적이 있었다. 그때 같은 여관에서 지내면서 한번도 자기를 넘보지 않았던 한철규의 무심한 태도를 그녀는 내심 잊지 않고 있었다. 자기가 이렇게 공을 들여 치장한 지금도 그때처럼 거들떠보지 않으려는지 그걸 알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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