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대통령이 보안법 혼선 부채질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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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노무현 대통령이 어제 MBC와의 인터뷰에서 국가보안법 폐지론자의 손을 들어줬다. "보안법은 부끄러운 역사의 일부분이고 지금은 쓸 수도 없는 독재시대의 낡은 유물"이라거나 "보안법을 없애야 이제 드디어 대한민국이 문명의 국가로 간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는 그의 발언은 너무나 확고했다. 대통령이 국가의 중요 정책과 현안에 대해 의견을 표시할 수는 있다. 그러나 국민 간 갈등을 부추기거나 정책의 혼선을 부채질하는 발언은 신중해야 한다.

사법부와 행정부의 핵심기관이 보안법 개폐 문제를 놓고 정면충돌하는 모습은 볼썽사납다. 대법원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전복하려는 자유까지 허용해 자유와 인권을 모두 잃어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된다"고 했고, 헌재는 보안법의 찬양.고무 조항에 대해 합헌 결정을 했다. 사법부를 대표하는 양대 축이 보안법 폐지의 부적절성을 지적했는데,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이 나서서 폐지의 정당성을 강조한 셈이다. 보안법 개폐의 결론이 어떻게 나느냐에 따라 대통령이나 사법부 어느 한쪽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는 건 불가피하게 됐다.

대통령의 발언은 정부와 여권 내의 건강한 의견수렴 과정도 훼손하게 될 것이다. 이해찬 총리는 최근 이부영 열린우리당 의장을 만나 "정치적으로 볼 때 보안법의 폐지보다는 개정이 낫다"는 의견을 전달했다고 하고, 김승규 법무부 장관은 수차례에 걸쳐 보안법 존속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당사자들이 머쓱하게 된 건 물론이고 이들은 앞으로 입조심을 할 게 틀림없다. 여당 내 보안법 개정론자들도 몸을 사리게 될 것이다. 그게 여권의 생리다. 대통령이 두부 자르듯 결론을 내버리면 정부.여당엔 강경파만 남지 않겠는가.

보안법이 역대 정권에 의해 악용됐던 것은 사실이지만 국가를 보위하는 순기능을 해왔음도 부인하기 어렵다. 아직 북한은 남측을 해방하겠다는 노동당 규약을 손댈 생각도 않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은 보안법을 개정하고, 폐지문제는 남북한의 신뢰가 구축되고 화해협력이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리는 정치적 유연성을 발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