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성 골수암 딛고 노숙자 안식처 일군 서일대 정창덕 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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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바람이 불었다.

겨울산을 타고 내려온 찬바람은 그들이 머물고 있는 지상의 방 한칸을 휘돌아보고는 조용히 계곡을 따라 내려갔다.

22일 오전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 '사랑의 울타리' 를 찾았을 때 가장 먼저 반긴 것은 애완견 '맹구' 였다.

누런색 털을 가진 작은 개 맹구는 낯선 손님을 경계하기는커녕 꼬리를 흔들고 주위를 맴돌며 환영했다.

사랑의 울타리는 오갈데 없는 이들 80여명이 서로를 보듬고 위로하며 살아가는 곳이다.

경제위기는 이제 끝났다지만, 하룻밤 새 수억원을 벌었다는 사람들이 속출하는 세상이지만,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로 인한 노숙자들은 여전하고 이곳은 그들을 위한 작지만 포근한 안식처다.

사랑의 울타리를 세운 이는 서일대의 정창덕(丁昌德.39.전산학)교수. 96년 10월 견딜 수 없는 피로감에 찾은 병원에선 그에게 '사형선고' 를 내렸다.

악성 골수암.

"3개월 이상 살기 어렵겠다고 하더군요. 의사가 주변을 정리하라고 했을 때, 울면서 서울 여의도성모병원 13층에서 내려다 본 세상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

아내와 여덟.여섯살난 두 아들의 간절한 기도와 치료 덕분이었을까. 丁교수는 몇차례의 위험한 고비를 넘겨가며 골수암과 싸웠고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병원에선 기적이라고 했다.

"남은 삶은 덤으로 사는 것이지요. 뭔가 남을 위한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

때마침 IMF 관리체제가 전국을 덮쳤다.

길거리엔 노숙자들이 늘어만 갔다.

그는 서일대(서울 중랑구 면목동) 자원봉사동아리 '서일대 봉사활동 119' 와 함께 서울역과 용산역을 찾았다.

김밥을 나눠주고 말상대가 돼주는 것만으론 부족하다고 느낀 그는 그들을 위한 보금자리를 꿈꿨다.

그래서 찾은 곳이 서울에서 가까운 양평군. 올해초 집을 아예 양평군으로 옮긴 그는 수련원을 빌려 노숙자들을 위한 울타리를 만들었고 지난달엔 지금의 기도원 건물로 옮겼다.

한달 건물 임대료만 1백50만원. 식비와 난방비 등 한달에 들어가는 돈은 1천만원에 이른다.

한국창의성개발학회장을 맡고 있는 그는 아픈 몸을 이끌고 기업체를 대상으로 한 컨설팅과 강연을 열심히 해 비용을 마련하고 있다.

"도와주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지난달부터는 서울시에서도 한사람당 하루 9백20원씩의 식비를 지원하고 있고요. "

그는 요즈음 즐겁기만 하다.

처음에는 건강도 좋지 않은데 노숙자까지 돌봐야 하느냐며 반대하던 부인(37)이 적극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가 부설 연구소의 소장으로 있는 한 기업체에서 양평군에 5천여평의 땅을 마련해 줬다.

내년 봄이면 그곳에 좀더 안락한 울타리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 그는 요즘 너무 행복하다.

작은 일이라도 그들에게 일거리를 줬으면 좋겠다는 丁교수는 "무엇보다 많은 이들이 들러 따뜻한 말벗이 돼주면 정말 고맙겠다" 며 환하게 웃었다.

사랑의 울타리 0338-774-4372.

최재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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