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혈세 우습게 보지 말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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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국회 정치개혁특위가 합의한 선거법 개정안 일부 내용을 보면 기성정치권이 국민세금을 얼마나 우습게 알고 헤프게 대하는지 실감난다.

선거비용 국고보전 범위를 대폭 확대하되 비용의 집행방법이나 용도는 달리 감시받지 않고 자기들 멋대로 해보겠다는 속셈이 빤히 들여다보인다.

연말 세금정산철을 맞아 병원비부터 자녀 유치원비까지 꼼꼼히 영수증을 챙기고 있는 국민의 눈을 조금이라도 의식했다면 이렇게 방만할 수는 없었다고 본다.

선거공영제를 지금보다 확대함으로써 불법.탈법선거의 소지를 줄이고 돈없는 유능한 인재들도 정계에 진출하도록 돕는다는 법개정의 기본방향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외국 사례와 비교하더라도 지나치게 많은 국고를 후보에게 제공하는 데다 그나마 후보들이 국민이 맡긴 혈세(血稅)를 적법하고 투명하게 썼는지 알아볼 수단들은 최대한 제한하는 쪽으로 법개정을 추진 중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특위가 합의한 대로라면 국회의원후보 1인당 평균 국고지원액은 지난 15대 총선의 2천여만원에서 내년 총선에는 7천5백만원 가량으로 늘어날 추세다.

여기에 각 정당에 지급되는 선거보조금을 합치면 우리의 선거비용 공영제는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과도한 수준이 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여론의 반발이 거세자 선거사무소 임대비용이나 전화비, 선거사무원 실비 등을 서둘러 국고지원 대상에서 제외했지만 우리는 이보다 더 축소해야 마땅하다고 본다.

더 큰 문제는 선거공영제를 구실로 국민세금만 탐냈지 공영제의 또다른 기둥인 선거관리.감시 측면은 나몰라라 했다는 점이다.

선관위가 선거운동 기간 중에도 후보자의 선거사무실을 실사(實査)할 수 있게 한다든가, 일정액 이상의 선거비용은 선관위에 신고한 계좌를 통해 입출금하도록 하는 아이디어 같은 것은 유권자나 납세자 입장에서 보면 응당 해야 할 조처들이다.

이런 조처들을 모두 빼고 돈만 주고 용처(用處)는 묻지 말라는 식이다.

사전이든 사후든 선거법 위반 여부를 아예 따지지 말아달라는 소리나 마찬가지다.

같은 맥락에서 정치개혁특위가 선거법 위반사범 공소시효를 현행 6개월에서 당초 3개월로 줄였다가 마지 못해 4개월로 해놓은 것도 납득할 수 없는 처사다.

고소.고발이 밀어닥치면 의정활동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기에 공소시효를 줄여야 한다고 의원들은 하소연하지만 말이 안되는 주장이다.

당장 15대 총선만 해도 선관위가 선거법 위반 여부와 관련해 확인.조사 대상에 올린 후보.선거사무원.업체 등이 9만여명에 이르렀다.

지난해 동시지방선거 때는 무려 17만여명에 달했다.

선관위가 추적.고발하고 사직당국이 기소 여부를 판단하는 데 4개월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결국 이 조항도 의원들이 '제 논 물대기' 식으로 변질시켰다는 의구심밖에 들지 않는다.

국민 혈세 무서운 줄 알고 남은 임시국회 기간 중 선거법을 제대로 바로잡길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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