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삶의 향기

네모난 추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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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어찌 보면 추억은 공간 그 자체다. 어떤 모양과 틀의 공간에 담겼느냐에 따라 추억은 주물처럼 형태를 달리한다. 아담한 잔디밭과 작은 연못을 가진 내 어릴 적 집의 정원은 아직도 곧잘 꿈속에 나타나 나를 푸르고 예쁜, 자부심 당당했던 소녀시절로 되돌려 놓는다.

서울 생활도 20년을 넘기자 나도 이젠 서울 친구들 부럽지 않을 정도로 이곳에 대한 추억을 만들었다. 20대 초반에 시작한 신문사 생활은 종로와 광화문 일대의 밥집과 술집에 대한 갖가지 기억들을 쌓아왔던 시간들이었다. 동이 터오도록 끝나지 않던 술자리가 아쉽게 마무리되던 해장국집,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낙지와 소시지와 베이컨의 오묘한 조화가 신기했던 밥집, 허물어질 듯한 벽에 온통 낙서만 가득했던 운치 있는 술집, 좋아하던 정종 대포를 일이천원 싼 안주로 먹을 수 있었던 구이집. 정신없이 먹어댄 술이 깨지 않아 괴로울 때면 미로처럼 얽힌 골목길을 돌고 돌아 찾아갔던 콩나물국밥집까지. 제멋대로의 모습을 한 집들은 제각각 어느 골목 어디쯤에서 젊은 시절의 내 기억들을 갖가지 모습으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골목길 속 제각각의 공간이 한 채의 커다란 빌딩 속으로 쑥 들어가 버렸다. 어디 골목에서 어디를 끼고 돌아 몇 번째쯤 집에 좁은 계단으로 올라갔던 그 집들은 네모난 빌딩 속에 네모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네모난 코너에 들어앉은 네모난 식당과 네모난 화장실로 바뀌었다. 그때는 좋았다고 믿고 싶은 어슴푸레한 젊은 날의 기억을 되살리고 싶어 찾아간 피맛골은 처참히 부숴지고 재조립돼 구획지어진 기억의 황량함만을 안겨줬다. 추억이 깃든 곳이 이렇게 슬프게 변해가는 모습을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근사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네모난 빌딩 속에서도 우리들은 또 새로운 추억을 쌓아갈 것이다. 피맛골이라는 옛날 냄새나는 이름보다 르 메이에르라는 프랑스어 빌딩 속에서 더 국제적이고 깔끔하게 만들어지는 추억들도 있으리라. 하지만 사각형의 아파트 몇 층 몇 호에서 나와 네모난 빌딩의 몇 층 몇 호를 오가며 만들어지는 네모난 추억들, 번호 매겨진 추억들이 구불구불 골목길 속 우리들의 추억과 같을 수 있을까. 그 정형화된, 수량화된 기억들은 젊은 사람들의 아름다운 미래를 열어나갈 든든한 양식이 될 수 있을까.

열다섯 살 아들이 저도 좀 살았다고 “친구 집 갈 때 지나가던 그 밭길이 전부 아파트가 됐더라”며 수도권 택지개발지구에서 사라진 제 추억과 공간을 말한다. 씁쓸하게 대꾸해줬다. “그게 우리가 몇십 년 동안 꾸준히 해온 일이란다. 부수고 짓고 또 부수고 짓고.”

이윤정 문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