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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키워드] 10. 블러경제학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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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인터넷으로 상징되는 컴퓨터와 통신의 결합은 인류생활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백조의 호수' 와 랩음악이 샘플링된 유행가처럼 시공(時空)을 달리하는 다양한 요소들이 짜깁기되는 이른바 포스트모던 문화의 특징은 자본주의 경제의 특성에서도 정확하게 나타난다.

생산.판매를 통한 이윤실현, 즉 생산과 유통이 순차적으로 이루어지는 전통적 자본 순환과정은 여러 구성단위들로 잘게 쪼깨져 이리저리 뒤섞이며 결합된다.

경제도 이젠 비트(bit)의 결합이라는 디지털화의 원리를 피할 수는 없다.

판매자와 구매자의 경계는 모호해진다.

수많은 인터넷 사이트들이 신상정보를 제공하는 대가로 심지어는 현금을 주기도 한다.

공짜라는 즐거움을 찾아 이리저리 기웃거리는 사이에 소비자는 이미 '정보' 의 판매자가 돼버린다.

가상서점인 아마존(http://www.amazon.com)에 입장하는 순간 '헬로 유동민, 당신을 위한 추천 도서목록입니다' 라는 선명한 안내문 앞에서 내 의사와 무관하게 책 몇권을 구입하는 행위와 개인정보가 '교환' 됐다는 사실이 나를 전율케 한다.

그 추천목록을 훑어보고 필요한 책을 골라 주문하기까지, 즉 광고에서부터 판매까지의 과정이 이루어지는 데에는 단 몇분도 걸리지 않는다.

시간과 공간의 극단적인 압축이 발생하면서 하나로 연결된 경제가 탄생한다.

몇가지 기본적인 메뉴를 디지털합성해 소비자가 선택하기도 전에 이미 맞춤형으로 제시되는 콘텐츠의 생산과정은 어디까지고, 유통과정은 어디서부터인가.

이제 상품의 가치가 생산과정에서 창출되느냐, 아니면 소비되는 순간 주관적으로 느껴지는 것이냐 하는 경제학의 해묵은 논쟁도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돼야 할지 모른다.

물적(物的) 자산보다는 이미지나 아이디어가 더 큰 이윤의 원천이 되면서 유형의 재화와 무형의 서비스 사이의 구분도 모호해진다.

기발한 착상으로 수많은 가입자를 끌어모은 다음 그를 바탕으로 막대한 주식거래 차익을 얻는 인터넷 벤처기업의 성장방식은 정보기술에 기반한 금융화의 흐름으로 인해 실물자산과 금융자산의 경계조차 이미 허물어져감을 의미한다.

'기간을 명시하지 않는 장기 고용계약' 을 하고 위계질서 속에서 일하는 기업조직의 외형은 점점 흐릿해지면서, 프로젝트 베이스로 모여 일하고 헤어지는 가상기업(virtual corporation)이 등장한다.

그렇게 되면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고용관계는 건당 계약으로 이루어지는 '교환' 으로 대체될 것이다.

누가 고용주이고 누가 피고용인인가의 구분이 무의미해져 버리는 상황이다.

스탠 데이비스와 크리스토퍼 메이어는 이러한 특징을 '블러(blur:흐릿함)' 라는 개념으로 표현한다.

전통적 구분이 희미해지고, 단지 하나로 연결된 네트워크와 교환만이 존재하는 것이 21세기 경제의 모습일 것이다.

이러한 주장이 정보화의 영향을 과대평가하고 있다는 비판은 최근 몇년간 눈부신 발전속도를 감안할 때 다소 한가한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중요한 문제는 새로이 형성될 네트워크 경제가 자본주의의 가장 중요한 대립적 발전의 축을 이루는 자본.노동의 관계, 그리고 다양한 차원에서의 주류와 비주류(마이너리티)간의 억압과 저항의 역사를 보다 평등한 방향으로 이끌어나가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뉴 밀레니엄에도 여전히 '사람만이 희망' 이지 않을까. 아무리 현란한 네트워크도 결국은 사람들이 운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동민(충남대 교수.정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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