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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인터뷰] ‘나영이 주치의’의 분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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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지난 2월 서울 강남 세브란스병원 소아정신과 신의진(45·사진) 교수의 진료실로 여덟 살짜리 여자아이가 들어섰다. 옆구리에는 커다란 성인용 대변 백이 채워져 있었다. 아이는 종일 말을 하지 않았다. 밥을 먹지도, 학교도 가지 않으려 했다. ‘조두순 사건’의 피해자 나영이(가명)였다. 신 교수는 “나영이는 성폭행을 당한 뒤에도 수많은 어른들에게 상처를 받았다”며 “나영이 사건만 들여다봐도 우리 사회가 아동 성폭행 문제에 얼마나 무지한지 알 수 있다”고 분노했다.

“죽어가는 아이를 먼저 살리고 봐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인터뷰 중간중간, 신의진 교수는 책상을 치거나 입술을 굳게 다물고 한동안 말을 잇지 않았다. 감정을 다스리는 것 같았다. 10여 년 동안 성폭행 피해 아동을 1000명 이상 진료해 온 그에게도 “나영이 사건(조두순 사건)은 울음을 참기 힘들 정도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고 한다. 신 교수와의 인터뷰는 지난 19일부터 모두 세 차례에 걸쳐 이뤄졌다. 다음은 일문일답.

-나영이를 처음 만났을 때 어땠나요.

“처음 왔을 때 굉장히 우울증이 심했어요. 예쁘고 똘망똘망한 아이인데, 아무 표정이 없었죠. 사건 발생 직후부터 정신과 치료를 함께 받았어야 했는데, 사건이 있고 두 달이 지나서야 찾아왔어요. 경찰도, 검찰도, 외과수술을 한 병원도 정신과 치료의 필요성을 알려주지 않은 겁니다.”

-그럼 어떻게 찾아온 거죠.

“아버지가 스스로 찾았어요. 개학을 했는데 나영이가 학교에 가지 않으려고 했대요. 그래서 인터넷으로 ‘성폭력 후유증’을 검색해봤고, 그제야 여성부가 운영하는 해바라기센터(아동 성폭력 지원센터)를 알게 됐대요. 그래서 당시 그곳 소속 의사였던 저를 만나게 된 거죠.”

-나영이의 정확한 병명이 뭔가요.

“우울증과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입니다. 나영이는 지금도 TV에서 큰소리가 들리거나 잔인한 장면이 나오면 화들짝 놀라고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떨어요. 충격을 심하게 받았기 때문에 나타나는 증상이죠.”

-조두순 사건은 형량뿐 아니라 다양한 문제점이 지적됐지요. 검찰이 다섯 차례나 진술을 요구했다는 게 알려지면서 비난을 받기도 했고요.

“어찌나 화가 나는지…. 죽어가는 아이부터 살려놓고 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검찰도 제정신이 아니지만, 그때 나영이를 치료하던 의사도 책임이 있어요. 검찰에서 진술을 요구하면 담당 의사가 ‘아직 회복되지 않았다’라고 제재를 했어야죠. 나도 의사지만 의사들 문제 많아요.”

-의사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 건가요.

“성폭행당한 아이가 가장 먼저 찾는 곳이 병원입니다. 수사를 위해 증거를 보존하고, 아이가 다른 어떤 치료가 필요한지 살피고, 또 다른 가족이 입은 상처도 치료해야 할지, 아니면 아이와 가족을 격리해야 할지를 다 의사가 정해줘야 해요. 그런데 우리나라 의사들은 지식도 관심도 부족해요. 기본적으로 공적 서비스에 정성을 안 쏟지요.”(※나영이가 외과수술을 받았던 병원 측은 ‘더 신경을 쓰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수사기관의 요청을 거부할 수는 없지 않으냐’는 입장을 밝혔다.)

-방법이 없을까요.

“교육을 시켜야죠. 산부인과·외과·비뇨기과·신경외과 의사들을 상대로 성폭행 문제에 대처할 수 있도록 교육을 해야 합니다. 의사 고시에도 관련 내용을 출제하고요. 그래야 바뀝니다.”

-진술 과정에서 두 번 상처받는 피해자가 나영이뿐만은 아니죠.

“말도 못할 정도로 많습니다. 나영이처럼 머리가 좋은 아이는 드물어요. IQ가 135인 나영이는 기절했다가 깨어난 뒤 스스로 신고를 했고, 범인 얼굴도 정확히 지목했죠. 보통 아이들은 열에 아홉은 진술이 명확하지 않아요. 충격 때문에 시간, 장소를 착각해서 말하기 십상이죠. 심하게 충격을 받은 경우엔 기억이 왜곡되기도 해요.”

-어떻게 기억이 왜곡되나요.

“예를 들면 이런 거예요. 10년 전, 유치원 원장의 남편에게 성폭행당한 5살짜리 여자아이가 ‘그때 아저씨가 내 손을 묶었다’고 하더군요. 실제 경찰 조사에선 손을 묶은 걸로 나오진 않았어요. 그럼 왜 그렇게 얘기하느냐. 저항할 수 없었던 상황이란 걸 강조하려는 마음 때문이에요. 그 뒤로도 ‘손을 묶었다’는 표현을 쓰는 아이들을 종종 봤어요. 그래서 아동심리를 잘 아는 전문가가 진술에 개입을 해줘야 합니다.”

-최근 여성부의 대처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좀 하셨지요.

“아동 성폭행을 전담하는 여성부의 해바라기센터는 관리가 안 되고 있어요. 병원·경찰 등과 손을 잡고 피해자를 찾아 나서야 하는데, 홍보 없이 찾아오는 피해자만 돕지요. 그리고 여성부는 아동 성폭행의 특수성을 잘 몰라요. 피해 아동이 처한 환경, 아동의 신체적·정신적 상태, 치료 과정과 후유증 관리, 사회적응 문제 등을 종합적으로 보자면 아동복지를 담당하는 보건복지가족부가 이 문제를 맡아야 합니다.”(※여성부의 해바라기센터 담당자는 “홍보가 덜 된 점을 인정한다. 경찰·병원 등에 협조를 요청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여성부의 전문성에 대한 지적에는 “아동이건 성인이건 성폭력 문제는 성폭력 전담 부처인 여성부에서 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사후 관리를 계속 강조하셨는데요, 나영이에게 지금 필요한 게 뭘까요.

“나영이는 평생 대변 백을 차고 살아야 합니다. 이 대변 백을 하루에 하나만 교환해도 한 달에 서른 개가 필요하죠. 성인용 대변 백은 10개에 5만원이고, 아동용은 값이 두 배예요. 그래서 나영이는 성인용을 차고 있어요. 평생 그 비용은 누가 지원해 주나요? 모금운동이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입니다.”

-추가로 수술비용도 들지 않나요.

“그렇죠. 나영이는 조두순이 물어뜯은 볼과 수술 흔적이 크게 남은 배에 성형수술을 해야 해요. 다행히 서울대 의대 권성택 교수가 볼 성형을 무료로 해주기로 했습니다. 이런 비용도 사회가 책임져야죠.”

-경제적 지원 외에 어떤 것을 도와야 하나요.

“일상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해요. 나영이는 지금 학교에 다시 다니고 있지만, 한때는 학교에 가지 않으려고 했어요. 친구들이 ‘너 성폭행당했다며’ 하고 놀렸다고 하더군요. 외국에선 아동 성폭행 피해자가 다니는 학교에 의사 등 전문가가 가서 교육을 해요. 학생·교사들을 상대로 피해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가르쳐 주는 거죠.”

글=김진경 기자, 사진=오종택 기자



신의진 교수는 연세대 의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2000년부터 같은 대학 정신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성폭행 피해 아동 치료에 관심을 쏟고 있다. 올 4월까지 해바라기센터 운영위원장을 맡는 등 10여 년간 1000여 명의 성폭행 피해 아동을 치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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