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프런트] 고교생 2명이 퍼뜨린 ‘플루 괴담’ 소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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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23일 오후 10시23분, 서울 D고 1학년 A군(17)은 인터넷에 “임상시험을 하려고 체력이 약한 노인 대신 학생들에게 백신을 접종한다”는 글을 유명가수 팬클럽 사이트에 올렸다. 인터넷 뉴스와 친구의 얘기를 조합해 만든 글이었다. A군의 글에는 ‘부모 동의서를 받는 것은 법적으로 빠져나갈 구멍을 만드는 것이다. 학교에서 백신을 접종하라는 동의서가 오면 거부해야 한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다음 날인 24일 오전 10시24분, 네티즌들이 포털사이트의 ‘연예인 정보 카페’에 이 글을 옮겼다. 이날 오후, 서울 H여고 2학년 여학생이 카페에서 이 글을 발견했다. 연예인 정보 카페의 주요 방문자는 10대 등 젊은 층이다. 여학생은 글의 내용을 같은 학교 친구 B양(18)에게 얘기했다. B양은 이날 오후 6시 친구 30명에게 문자를 보냈다. 이때 ‘그거 잘못 맞으면 죽는다. 접종 거부하자’ 같은 말을 덧붙였다.

잉크 한 방울을 물에 떨어뜨린 것처럼 문자는 확 퍼져 나갔다. ‘지역별 휴업’ 논의가 일 정도로 신종 플루 사태가 커진 28일께 상당수의 초·중·고생들이 이 문자를 받았다. 수사에 나선 경찰은 A군과 B양을 29일 검거했다. A군과 B양은 경찰 조사에서 “정말 두려워서 그랬다. 심각한 마음으로 글을 올렸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이들을 조사한 경찰관은 “학생들이 헛소문을 퍼뜨리려고 고의로 한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고 전했다.

다른 괴소문들도 퍼져 나갔다. ‘수학능력시험이 연기될 것’이란 근거 없는 전망부터 ‘손 세정제를 쓰면 면역력이 약화된다’ ‘귀 체온계를 통해 신종 플루가 전염된다’는 소문까지 다양했다. 미국이 신종 플루 바이러스를 유포했다는 음모론도 가세했다.

서울경찰청 사이버범죄수사대 정병선 팀장은 “이번 사건은 일반적인 괴담 유포 과정을 잘 보여준다”고 말했다. 우선 공포를 느낄 수 있는 분위기가 충분히 조성돼 있었다. 연일 신종 플루 확진환자 사망 뉴스가 나오는 상황에서 학생들은 신종 플루를 ‘피할 수 없는 위험’으로 인식했다. 여기에 가장 빠르고 친숙한 매체인 인터넷과 휴대전화가 동원됐다. 전달되는 과정에서 ‘상상에 의한 비약’이 이뤄졌다.

‘10대’라는 연령대의 특수성을 주목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서울대 한상진(사회학) 교수는 “10대는 위험에 대한 감수성이 어른보다 예민하다”며 “아이들은 자신들에게 정부가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고 있다고 느끼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 이번에 검거된 두 학생은 ‘이상한 아이들’이 아니었다. 경찰에 따르면 B양은 성적이 좋은 모범생이고, A군은 자기에게서 비롯된 파문에 놀라 말을 제대로 못 했다. 성신여대 채규만(심리학) 교수는 “이번 사건의 밑바탕에는 10대의 독특한 가학적·공격적 성향과 관심을 받고 싶은 심리가 깔려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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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은 괴담에 맞설 수 있는 ‘공적 신뢰’가 회복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단순히 잘못했다, 계몽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머무르면 안 된다는 것이다. 서강대 전상진(사회학) 교수는 “공적인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는 절차를 마련하고, 일반인도 그 정보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강인식·장주영·이현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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