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새천년 도전 현장-중국] 중화깃발 옛영화 되찾는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중국이 97년 새로 지은 외교부 청사의 정문은 전설 속의 새 대붕(大鵬)이 양 날개를 쫙 펼친 듯하다. 본건물은 19층이고 좌우로 12층짜리 별관이 들어서 있다. 멀리서 바라보면 가슴을 잔뜩 부풀린 채 앞으로 쑥 내밀고 날아가는 새의 모습이다. 연건평 13만㎡의 이 건물엔 3천명(전세계에 파견된 외교관은 2천명)이 중국의 미래 세계전략을 생각하고 있다.

21세기를 위해 새로 지은 중국 외교부의 건물이 하필이면 세계를 뒤덮을 만한 대붕의 모습이 됐을까. 혹시 세계를 본격 '관리' 하겠다는 새 천년 중국 외교전략의 속내를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중국발전연구소의 장린훙(張林泓)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공격적이고 개방적으로 외교를 꾸려가겠다는 영도층(領導層)의 의도를 상징적으로 구현한 것이다. 움츠림에서 도약으로, 적의에서 호의로, 대립에서 화합으로 무게중심을 옮기겠다는 선언문일 수 있다. "

중국 건국 50주년 기념식이 열린 10월 1일 천안문(天安門)광장. 신형 전투기들을 거느린 채 공중 급유기가 상공을 압도했다. 중국이 자체 연구.생산한 이 급유기로 중국 공군은 원거리 작전수행이라는 숙원을 풀었다. 사정거리 8천㎞인 미사일 동풍(東風)-31을 비롯, 행사에 동원된 무기의 95%는 중국이 독자 개발한 것이다.

다시 말해 자체 개발한 무기로 독자적인 방위체계를 완벽하게 구축했다는 선언에 다름 아니다. 미국.러시아에 이어 세계에서 세번째다. 바로 이런 선언을 하고 싶어서였을까. 중국은 15년간 중단했던 건국기념일의 군사퍼레이드를 올해 다시 시작한 것이다.

전략무기를 포함해 중국이 미.러에 못지 않은 무기체계를 갖추겠다는 야심은 지난달 20일 쏘아올린 무인우주선에서도 드러났다. 8월엔 항공모함 건조를 공식 결정했다. 미국의 최첨단 스텔스 전투기까지 추적할 수 있는 독자적인 방공망을 구축했다는 소식도 들린다. 리펑(李鵬)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은 공중조기경보통제기(AWACS)를 도입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비밀리에 방문했다고 이스라엘 신문이 1일 보도했다.

외교전략의 대전제는 경제력과 군사력이다. 중국은 세계무역기구(WTO)에 곧 가입한다. 중국 시장을 무시할 수 있는 나라는 없다. 따라서 군사력만 뒷받침된다면 미국이라도 호락호락 달려들 수 없다. 중국이 군사력을 강화하는 배경은 바로 그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중국은 아직도 미국이 두렵다고 말한다.

중국현대국제관계연구소의 쑨커친(孫恪勤)박사는 "미국과 서방세계의 압력은 외교.군사.경제의 전방위에서 시시각각 중국을 조여오고 있다" 고 진단한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를 중심으로 한 서방세력이 유럽에서 동진(東進)하고, 반대로 동쪽에서는 미국의 구호 아래 일본.대만.한국.호주를 연결하는 세력이 '부채꼴 포위망' 을 구축하고 있다는 얘기다.

미국이 대만에 첨단무기를 판매하고 신미.일방위지침과 전역미사일방위(TMD)체계를 마련한 것도 마찬가지 이유라는 판단이다. "동서 양쪽으로 압박해 중국의 행동반경을 최소한으로 묶어두겠다는 것" 이라고 孫박사는 정의했다. 그러나 중국이 가장 경악한 것은 신간섭주의의 등장이다.

"국가의 주권보다 인권이 우선한다" 며 나토가 유고를 공습한 게 대표적인 사례다. 같은 논리라면 서방 연합군은 언제라도 중국을 공습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국제관계연구소의 옌쉐퉁(閻學通)박사는 "서방의 압력을 견제한다는 데서 중국 외교가 시작된다" 고 말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대국외교와 지연(地緣)전략이다. 덩샤오핑(鄧小平)이 주장했던 '외교적 최소간섭주의' 를 포기하고 적극적으로 지역국가를 품으로 끌어들이겠다는 전략이다. 반(反)나토 혹은 항(抗)나토의 성격을 지닌 제2의 바르샤바동맹을 결성하겠다는 것이다.

홍콩 영자지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지는 지난 5월 베이징(北京)의 고위소식통을 인용해 "중국이 나토에 대항하는 새 동맹을 결성키로 결정했다" 고 보도했다.

이들을 끌어들이면 핵무기를 보유한 25억 인구가 함께 뭉치는 셈이다. 전통적으로 군사적 유대가 깊은 이란과 이라크.파키스탄 등도 유력한 후보다. 중국의 뒷마당 미얀마도 빼놓을 수 없다.

상대적으로 미국의 영향력이 엷은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도 소중하다. 주룽지(朱鎔基)총리는 지난 22일 말레이시아.싱가포르.베트남.필리핀을 차례로 방문하고 '아세안+3' 회담까지 참석하면서 가는 곳마다 성의를 아끼지 않은 것은 우연일 수 없다.

물론 중국은 주변국과 적지 않은 영토문제를 안고 있다. 인도.베트남과는 전쟁도 치렀다. 아시아의 다양한 문화도 걸림돌이다. 그러나 중국은 한걸음 한걸음 착실하게 정지작업 중이다. 인도.러시아.카자흐스탄 등과는 영토분쟁을 덮어두자는 협정을 차례로 맺어가고 있다. 필리핀과는 난사(南沙)군도 영토분쟁을 당분간 묻어두기로 합의했다. 중국은 대만문제도 성급히 매달리기보다 미국과의 담판으로 해결하려는 속셈인 것 같다.

하지만 홍콩의 중국문제 전문가인 정치평론가 쾅신(匡欣)은 "21세기 중국은 미국에 맞설 것이다. 그러나 사생결단식 대결을 원하는 것은 아닐 것" 이라고 말했다. 주먹질과 어깨동무를 엇섞어가며 중국은 21세기의 세계를 '공동관리' 하는 미국의 파트너로 커나가려 할 것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모든 나라가 갖는 외교의 궁극적 목적은 분명하다. 세계의 모든 나라가 자국에 우호적이 되도록 여건을 조성하려는 것이다. 중국 같은 덩치의 나라가 그런 목표를 달성한다면 곧 세계지배라 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

베이징.홍콩=진세근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