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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나절 행복] 순백의 방에 북악산이 들어앉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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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문턱까지 다가왔다. 쾌청한 오후 부암동 환기미술관에 가보자. 도심에서 가깝고 볼거리 많고 조용하고 조촐한 화랑이다. 전시도 전시지만 건물 자체만도 구경거리다. 자하문으로 더 잘 알려진 인근 창의문에도 올라가 보고 내친김에 북악 스카이웨이를 한바퀴 돌아온다면 당신의 반나절은 삽시간에 쾌적하고 넉넉해질 것이다.

환기미술관은 아름답고 독특한 건물이다. 화랑 전체를 빙 둘러싼 외부계단이 있다. 전면도로와의 고저 차가 8m 이상 나는 급경사 대지에 지었으니 계단은 불가피했다. 생전의 수화(樹話) 김환기와 친분있던 건축가 우규승은 어쩔 수 없이 생기는 계단을 집의 매력으로 바꿔놓을 줄 알았다. 입장료 2000원을 내고 일단 미술관 계단을 올라가자. 시점이 달라지는 주변 북악산과 인왕산을 바라보자. 모퉁이, 뜰, 창, 내부와 외부의 들락거림을 다 음미하고 구경해야 한다. 맨 꼭대기 라일락 그늘 아래 잠깐 멈춰서서 숨을 고르자. 이 집의 미감은 숨고르는 그 순간, 비로소 제대로 발휘될 것이다.

집 재료는 화강암이다.우리의 탁월한 건축재 화강암은 빛깔이 아름답고 조직이 치밀하며 경도가 야문 것이 특장인데 그 중 빼어난 게 포천석과 문경석이다. 집이 한창 지어질 92년 당시 생존해 있던, 한때 시인 이상의 부인이기도 했던 김향안 여사는 김환기 예술을 보존.전시하는 이곳을 최고의 집으로 만들기를 원했다. 당연히 포천석과 문경석만 골라 썼다. 지붕과 벽 모서리는 납을 입힌 동판을 올렸다. 담장은 원래 이곳에 있던 산성의 형태를 본떠 만들었다. 서양식 건축이지만 이 집은 북악산이란 배경을 조금도 거스르지 않는다. 녹아들어 어우러졌다.

겉을 다 봤으면 이제 안을 볼 차례. 9월 중순까지는 네덜란드 화가 리아 라임뵈크의 유화전이다. 그러나 본관 1, 2층엔 김환기 그림이 상설 전시돼 그의 유명한 점묘(點描)그림을 언제나 구경할 수 있다. 벽은 모조리 희다. 흰빛은 수화의 꿈꾸는 듯한 파랑과 분홍과 노랑을 상냥하게 떠받쳐 준다. 흰바탕 위에 단조롭게 떠오르는 파랑.분홍.오렌지빛 점들을 가만히 오랫동안 고요하게 들여다보는 즐거움, 그게 환기미술관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행복의 핵심이다.

마루바닥도 지나쳐 보지 말자. 자잘한 단풍나무 조각들을 촘촘히 잇댄 세련된 마루판은 그 자체가 수화 그림의 점묘이미지를 넘나든다.

환기 미술관 입구는 카페테리아다. 커피와 음료를 3000 ~ 4000원에 팔고 있다. 다른 미술관 카페보다 호젓해서 좋고 수화 그림을 응용한 머플러.가방.우산.티셔츠도 판매 중이다. 제안 하나. 여기서 모직 머플러(3만 ~ 10만원)를 사 표구점에 맡겨 액틀을 만들자. 그러면 아주 싼값에 수화그림을 벽에 걸어놓는 효과를 얻게 된다. 어느 미술관이든 작가의 모티브를 딴 머플러들이 마련돼 있으니 가을철 인테리어에 참고하시라고 살짝 귀띔한다.

김서령 생활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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